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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정규직도 아니었다…무용계 오스카상 강미선의 2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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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부족한 점을 채우고 채우다 보니 21년이 흘렀습니다."

강미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는 21년 무용 인생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발레팬들에게 '갓(god)미선'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테크닉과 표현력을 두루 갖춘 '올라운더' 무용수지만 "부족했기 때문에 더 노력했다"며 몸을 낮췄다. '무용계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브누아 드 라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여성무용수 상을 받은 그를 27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강미선 수석무용수가 27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전민규 기자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강미선 수석무용수가 27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전민규 기자

강미선은 이날 "바닥을 다지며 올라왔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원하는 역할을 턱턱 받는 유망주였다면 20년 넘게 춤을 추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다.

지난 3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발레 '미리내길'을 공연 중인 강미선(오른쪽), 이현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지난 3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발레 '미리내길'을 공연 중인 강미선(오른쪽), 이현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강미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직업 무용수가 됐다. 선화예중을 거쳐 선화예고 1학년을 마친 뒤 워싱턴으로 떠나 키로프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1년 반 더 익혔다. 시작은 바닥이었다. 정규직도 아닌 연수 단원으로 시작해 준단원, 정단원, 드미솔리스트, 시니어솔리스트, 수석무용수를 전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거쳤다. 어릴 때부터 각종 콩쿠르를 석권하고 입단부터 '솔리스트'로 발을 떼는 여느 스타 무용수들과는 다른 출발이었다.

그는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브누아 드 라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이 안무한 창작 발레 '미리내길'.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을 담은 한국적인 작품이다.

강미선은 "볼쇼이 극장에 들어섰을 때 한국 발레를 보여준다는 생각 만으로도 벅찼다"고 했다. 다른 후보들은 '오네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2시간 짜리 고전 전막 발레작으로 후보에 올랐지만 강미선은 국악 크로스오버 음악에 한국 무용 동작을 녹여낸 6분 짜리 창작 발레 작품으로 승부를 봤다. 시상식 갈라쇼에서 선보일 작품으로도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 발레 작품 '춘향'을 골랐다.

강미선은 "상을 받은 것 만으로도 영광이었지만 '미리내길'로 상을 받을 수 있어서 더 특별했다"며 "이 작품을 처음 만들 때부터 주역으로 관여해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극장에서 가장 한국적인 발레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이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유니버설발레단 유병헌 예술감독(왼쪽)과 강미선 수석무용수. 강미선 무용수는 유병헌 감독이 안무한 창작 발레 '미리내길'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를 연기해 지난 20일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무용계 최고 권위의 상인 '브누아 드 라당스' 여성 최고 무용수 상을 받았다. 전민규 기자

유니버설발레단 유병헌 예술감독(왼쪽)과 강미선 수석무용수. 강미선 무용수는 유병헌 감독이 안무한 창작 발레 '미리내길'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를 연기해 지난 20일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무용계 최고 권위의 상인 '브누아 드 라당스' 여성 최고 무용수 상을 받았다. 전민규 기자

이날 강미선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은 "'미리내길'은 처음부터 강미선을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은 테크닉보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절절한 감정 표현이 관건"이라며 "강미선 무용수와는 작품 제작 초기 단계부터 동작 하나하나 호흡을 맞췄다. 감독이 가르치면 그냥 떠먹는 무용수가 아니고, 스스로 연구하고 시도하는 창의적인 무용수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유 감독은 1999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에 합류해 발레단의 창작 레퍼토리를 넓혔다. 시상식에서 강미선이 선보인 발레 '춘향'도 그의 작품이다.

강미선은 '미리내길'을 연습하며 유 감독으로부터 "채끝처럼 춤추라"는 디렉션을 받았다. 유 감독은 "안심처럼 부드럽게만, 예쁘게만 춤을 추지 말고 고소한 맛, 질긴 맛, 육즙이 터지는 맛을 모두 내라는 의미"라며 "강미선은 한국 특유의 '한'이나 '정' 같은 정서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무용수"라고 했다.

27일 오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왼쪽부터)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 강미선 수석 무용수, 유지연 지도위원, 유병헌 예술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오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왼쪽부터)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 강미선 수석 무용수, 유지연 지도위원, 유병헌 예술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용수의 커리어 황혼기인 40대에 큰 상을 받은 강미선에게 새로운 꿈이 있을까. 그는 "체력은 떨어지지만, 표현력이나 발레를 향한 애정은 점점 커진다"고 했다. "신체 조건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백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지금껏 '백조의 호수'를 두려워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아 1분 1초가 소중하다"면서다. 그는 "그래서 길게 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역할을 보여드리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오랜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다. 어깨 연골과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두 달을 넘기지 않고 복귀했다. "큰 부상을 겪지 않은 데는 운도 따랐고, 좌절스러운 상황이라도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늘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는 설명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강미선 무용수가 발레 '돈키호테'를 공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강미선 무용수가 발레 '돈키호테'를 공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모든 무용수가 '나는 왜 이게 안 될까', '나는 왜 이 역할을 못 맡을까' 라는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아직 내 시간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하던 연습을 계속했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문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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