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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입에서 '당꼬'" 폭로뒤…'이례적 실형' 담합 처벌 세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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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조달청이 발주한 철근 입찰에서 6조8000억원대의 담합을 한 현대제철·동국제강 등 7개 철강회사와 전·현직 임직원 22명에게 최근 모두 유죄가 선고됐다. 담합을 주도한 현대제철에는 법정 최고액인 2억원의 벌금이 부과됐고, 전직 임원 2명은 법정구속됐다. 집행유예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던 담합 행위에 대해 법정구속까지 한 것은 이례적이다. 담합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담합 행위에 대한 처벌 의지가 강력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현대제철 철근공장 냉각대. 사진 현대제철

현대제철 철근공장 냉각대. 사진 현대제철

이번 수사를 지휘한 이정섭(52·사법연수원 32기)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걸려서 벌금을 내더라도 차라리 담합을 하는 게 낫다는 것이 그간 기업들의 정서”였다고 지적했다. 담합은 막대한 예산 낭비와 심각한 소비자 이익의 희생을 불러온다. 하지만 검찰은 공정거래위원회가 고발한 범위 안에서 소극적으로 수사하고, 법원도 벌금이나 집행유예 선고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부장검사는 그간 담합 사건 처벌에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통상 공정위는 자료 제출 등 임의 조사 형태로 담합 사건을 처리한다. 강제수사가 안되니 관계자들이 입을 다물면 처벌은 하위직에서 그치고, 실제 지시를 내린 기업의 고위 임원들은 대부분 책임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결국 과징금 규모에만 관심이 쏠리고, 그나마도 행정소송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사건이 기존 공정위 고발사건 처리 방식의 틀을 깼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 사건은 조달청이 매년 시행하는 관급공사용 철근 입찰에서 담합이 이뤄진 사실을 공정위가 포착하면서 시작됐다. 공정위는 조사를 통해 대형 철강회사들이 2012년부터 7년간 입찰 가격을 담합한 사실을 밝혀내고, 지난해 8월 11개 회사에 256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와 별도로 7개 대형사의 전현직 임직원 9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정섭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이 23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이정섭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이 23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수사 시작은 여느 공정위 고발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장검사는 “실무진부터 조사해서 ‘윗선’으로 올라갔는데, 상무급에 이르러 ‘나는 보고받지 못해 몰랐다’고 꼬리를 자르며 버텼다”고 설명했다. 결국 상무급 인사가 구속됐다. 그러자 실무진 한 명이 “사장님이 저한테 ‘이거 당꼬(담합의 일본식 발음) 된 거죠?’라고 물어봤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이때부터 수사가 급진전했다.

이원석 검찰총장도 공정거래 사건에서 검찰 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수사팀은 고발된 회사에 대해 일제히 압수수색을 벌였다. 실무자 진술과 압수수색 자료를 토대로, 기존 고발을 넘어서는 범위에 대해서는 추가 고발을 요청했다. 결국 3명을 구속하고, 고발 대상의 2배가 넘는 22명의 전·현직 임원을 기소할 수 있었다.

이정섭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이정섭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이 수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역대급 수사 성과를 올렸는데도 검찰은 지난 23일 항소했다. 이 부장검사는 “미국은 담합과 관련한 법정형이 징역 10년 이하, 벌금 100만 달러(약 13억원) 이하인 데 비해 우리 공정거래법은 양형이 너무 낮다”며 “‘차라리 담합을 하고, 얼마 안되는 벌금 내고 말겠다’는 생각을 고쳐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담합과 같은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은 공정위가 먼저 조사해 고발해야만 검찰이 수사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런데 최근 검찰이 고발 전에 먼저 수사한 후 고발 요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부장검사는 “공정위와 검찰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협업 관계”라며 “경쟁 질서 저해 사범에 대한 국가적 대응 역량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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