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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살 키신저의 팁 ‘중국과 함께 살아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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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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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의 가장 찜찜한 불안 중 하나는 중국과의 향후 관계다. 이 즈음 지난달 100세를 맞은 헨리 키신저 전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중국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이코노미스트 인터뷰, ‘3차대전 피해가기’)를 남겼다. 49세에 미·중 수교를 이룬 외교관이자 탁월한 중국연구 학자인 그의 식견은 339㎞ 거리의 중국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도 생각할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대만=키신저의 미·중 수교 회고. “마오쩌둥 주석은 현안마다 ‘나는 철학자다. 그런 주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런 건 저우언라이 총리와 얘기하라’ 하더라. 그런데 대만 문제만은 노골적이더라. 마오는 ‘그들은 반혁명 분자의 무리다. 우리는 지금은 그들이 필요치 않다. 100년을 더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그들에게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하더라.” 키신저는 “마오가 100년은 기다리겠다고 했던 닉슨과의 공감대가 트럼프에 의해 50년 만에 뒤집힌 것”이라고 현 대만 위기를 분석한다.

저서 『중국 이야기(On China)』에서도 그는 비슷한 분석을 했었다. “베이징에 타이완은 외세 동맹과 손잡은 변절자들의 성이다. ‘굴욕의 세기’의 마지막 잔재다. 외국의 지원을 받는 별도의 행정당국이 있는 한 ‘새로운 중국 건설’이란 영원히 미완이다.” 서구에선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 베이징에선 ‘새 중국의 완성’이란 얘기다. 그러니 대만 문제만은 우리도 분쟁 등의 가정적 질문엔 말을 아끼는 게 평화적이겠다.

중국의 가장 민감 이슈는 대만 문제
‘보편적 가치의 질서’에도 모욕 느껴
중국은 해체 아닌 영구 대화가 해법
우리도 중국 연구·이해 성숙 접근을

▶유교, 그리고 중화(中華)=인터뷰의 키신저는 “마르크시스트라기보다 유교적(more Confucian than Marxist)”이라고 중국을 평가했다. 북한을 지원한 그들과 전쟁을 치렀고, 북핵에도 방관적이니 우리로선 언뜻 이해할 수 없다. 키신저의 강조점은 그러나 ‘우주의 중심’ ‘유일한 황제’라고 여겼던 중화사상이 그들의 외교에 미쳐 온 영향 같았다.

그의 이전 연구(『중국이야기』)가 더 구체적이다. “청나라 동치제는 링컨 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1863년)에서 ‘우주를 통치하라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그 중심의 중국이나 주변국들이나 조금도 차별 않고, 한 가족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설혹 타 민족이 너무나 방대한 중국을 점령하더라도 오히려 동화돼 중국의 한 부분이 될 뿐이라는 가치관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가치·사상을 해외로 퍼뜨릴 필요도 없었다. 변방에서 침입하려는 야만족들이 연합하지 못하도록 ‘분열된 주변부’로 관리만 하면 되는 배부른 제국이었다. 황제에의 조공(朝貢), 고두(叩頭)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준수케 하고, 감히 그 힘을 시험하지 못하게 하는 세계관이었다.”

체크메이트(외통수)로 상대의 킹을 없애야 이기는 서양의 체스와 달리 부분에선 패해도 전체의 집이 더 많으면 이기는 웨이치(바둑),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인 손자병법도 그런 맥락이었다. 키신저의 인터뷰 결론은 이렇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성취하고, 그에 대해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다. 떠오르는 강대국으로서의 특권 자체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워싱턴은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믿지만 중국이 히틀러 식의 세계 지배를 향해 가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미국보다) 우월해져도 중국 문화를 외부에 강요하는 지점까지 갈지는 잘 모르겠다. (내 본능으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시진핑 중국주석은 지난주 방중한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게 이런 얘기를 꺼냈다.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중국을 존중하고, 중국의 정당한 권익을 해치지 말기를 바란다.”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국익에 대한 중국 스스로의 판단·결정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요구다. “세계에서 중국을 무시하는 유일한 나라”란 조크를 듣던 우리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화두다.

▶보편적 가치의 세계 질서=그러니 중국이 화낼 서구의 표현은 ‘글로벌 규칙 기반의 질서(a global rules-based order)’라는 게 이 노(老)학자의 얘기다. “그건 그냥 미국의 규칙이자 질서”라는 베이징엔 “중국이 행동에 나서면 걸맞는 특권을 부여하겠다”는 모욕이란 논리다. 최근 민주주의·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 는 나라들의 연대’라는 표현을 부쩍 강조해 온 우리 정부였다.

▶“공동의 가치 찾아 영구적 대화를”=백 살의 이 학자는 “인류의 운명은 미·중 공존에 달렸다”며 “체제 교체나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 중국에 미국의 이익이 있다는 점을 수용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함께 협력할 공동의 가치, 전략적 역할을 찾아낼 영구적 대화가 관건”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재, 5년 이내 모든 적을 파멸할 수 있을 AI의 관리를 대화의 대상으로 꼽았다.

육지의 15분의 1, 인류의 18%인 중국.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구하고, 이해하려 해 보라.” 아마도 키신저의 가장 소중한 ‘공존’의 노하우일 터다. 물론 중국 역시 한국에 그래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