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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주름잡던 ‘댄싱퀸 언니들’…추억팔이인가, 스타 귀환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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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호 18면

 이효리의 ‘댄스가수 유랑단’

아이돌 걸그룹 천하에 난데없는 ‘댄스가수 유랑단’이 등장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김완선부터 엄정화·이효리·보아·화사까지, 경력 총합 129년차 ‘언니들’의 기세가 심상찮다. 5월말 첫 방송 이후 굿데이터 TV-OTT 비드라마 쇼 출연자 부문과 프로그램 부문 모두 화제성 최상위권에 랭크됐고, 가장 핫한 가수들만 초대받는 대학 축제까지 섭렵하며 세를 불리고 있다. 역대 ‘댄싱퀸’들이 고속버스를 대절해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대중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콘셉트인데, 예능감 충만한 이효리가 툭 던진 아이디어를 ‘무한도전’ ‘놀면 뭐하니’의 김태호 PD가 실현시킨 케이스다.

대학 축제까지 섭렵하며 세 불려

‘댄스가수 유랑단’의 이효리. [사진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이효리. [사진 tvN]

‘유랑단장’을 자처한 이효리를 두고 ‘언제까지 추억팔이 예능만 하고 있을 거냐’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Y2K 트렌드에 기댄 단순 레트로는 아니다. 이효리가 “지난 10년이 숨고 싶은 10년이었다면 앞으로 10년은 소통하는 10년으로 삼고 싶다”며 적극적인 활동을 시사한 점을 고려하면, ‘추억팔이’는 몹시 영리한 전략이다. 파릇파릇한 걸그룹들이 데뷔하자마자 충성도 높은 팬덤을 거느리고 럭셔리 브랜드 앰버서더가 되어 지구를 점령한 외계인처럼 머나먼 존재가 된 지금, 서민들의 삶의 현장까지 내려가 전 세대가 떼창 가능한 ‘국민가요’들로 존재감을 충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만 뜨겠다는 태도가 아니라서 더 눈길을 끈다. 거의 잊혀진 댄스가수였던 김완선과 엄정화를 ‘레전드’의 위엄을 환기시키며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다. 이들의 노래를 알 리 없는 태권도 경기장 초등학생, 사관학교 생도 같은 Z세대에게 찾아가 ‘반강제’로 흘러간 댄스곡을 들려주는 모습은 가요계에도 ‘중년 여인천하’를 꾀하는 느낌이다.

‘댄스가수 유랑단’의 엄정화. [사진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엄정화. [사진 tvN]

가요계에서 나이 든 여가수의 존재는 천연기념물과 같다. 댄스가수의 수명은 더 짧다. 신곡을 발표하며 활동의지를 보여도 반응은 제한적이다. ‘한물 간’ 여가수의 무대를 굳이 만드는 기획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 이효리는 멍석을 스스로 까는 방식으로 여가수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김완선이 누군가. ‘댄스가수’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신중현·손무현 같은 당대의 로커들이 작곡한, 지금 들어도 세련된 ‘리듬 속에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으로 시대를 개척한 파이오니어다. 엄정화는 또 어떤가. ‘배반의 장미’ ‘포이즌’ ‘페스티벌’ 등 전국민을 춤추게 한 메가히트곡들을 잔뜩 보유한 섹시 디바의 대명사다. 노래도 많고 취향도 다양해진 아이돌 춘추전국시대, 팬이 아니면 잘 구별도 못하는 요즘 걸그룹과는 다른 존재감이다.

‘댄스가수 유랑단’의 김완선. [사진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김완선. [사진 tvN]

이효리 본인은 말할 것도 없다. 1990년대 후반 1세대 걸그룹 ‘핑클’ 리더로 새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 초 요정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주체적인 욕망을 드러낸 ‘텐미닛’ ‘유고걸’ 등 화끈한 가사와 독보적인 무대 매너로 솔로 여가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수퍼스타다. 비교적 어린 보아와 화사도 각 세대를 대표한다. ‘댄스가수’라는 아이덴티티로 대동단결한 자매애를 엮어내면서, 이 계보의 끝에 한창 현재진행형인 화사처럼 숱한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기 색깔을 지키는 아티스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랑단장’이라는 감투처럼, 이효리는 일개 가수가 아닌 가요계 대모의 포스다. 스스로 “못 돌아올 줄 알았다”면서 위축돼 있던 왕언니들을 격려하고, 나름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후배들을 다독이는 포용력을 과시한다. 그뿐 아니다. 전성기를 함께 했지만 지금은 설 무대가 없는 왕년의 댄서들까지 소환해 다시 춤추게 했다.

‘댄스가수 유랑단’의 보아. [사진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보아. [사진 tvN]

압권은 대중과의 스킨십이다. “언제까지 무대 위에서 살 거야? 바닥에 내려오자 이제”라는 그의 말처럼, 딱 ‘맨바닥 눈높이’를 지향한다. 사연을 보낸 팬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 소방서 주차장 시멘트 바닥부터 포차거리 군중 속까지 파고들어 함께 춤춘다. “삶의 무게 때문에 흥을 잃은 분들이 미치도록 신나게 춤춰보고 즐겁게 파이팅해서 살았으면 좋겠다”면서다. 특정 아티스트에 배타적인 요즘 팬덤이 아니라, 누구나 품고 있는 스타에 대한 로망을 채워주는 훈훈한 풍경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관객을 부르는 게 아니라 서민들 속으로 찾아가는 컨셉트라는 게 핵심”이라면서 “한때 톱이었던 레전드들이 대중들의 지지에 의해 얻어진 위치를 팬들에게 돌려주며 공감을 꾀하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전세대 떼창 ‘국민가요’로 존재감

‘댄스가수 유랑단’의 화사. [사진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화사. [사진 tvN]

바닥에 내려오니 스타도 사람이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 첫 방송을 앞두고 노심초사하다 반응을 확인하고 숨어서 울음을 터뜨리는 인간 엄정화의 모습이 낯설지만, 배우로서나 가수로서나 사면초가를 극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를 응원하게 된다. 한창 때도 칭찬받지 못해 서글펐다는 ‘원조 댄싱퀸’ 김완선, 무대 아래의 쓸쓸함을 고백하는 ‘아시아의 별’ 보아의 그림자도 인간적이다.

그런데 이효리가 진해 군항제 첫 무대를 앞두고 바짝 긴장한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가수 이효리로서 컴백에 진심이란 얘기다. ‘싹쓰리’ ‘환불원정대’에서 ‘린다G’ ‘천옥’이라는 부캐로 능청을 떨었다면, 지금은 진짜 이효리의 부활을 앞두고 자신의 역사를 복기하고 있는 것이다. ‘잘 봐, 이런 엄청난 노래들을 부른 게 나 이효리야’라면서. 김태호 PD도 “‘댄스가수 유랑단’은 단순히 과거 명성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다섯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며, 곧 새롭게 펼쳐질 이들의 또 다른 장을 활짝 열면서 끝낼 것”이라고 전했다.

과연 이효리는, 아니 ‘댄스가수 유랑단’ 멤버들은 이 K팝 전성시대에 레전드로서가 아니라 계급장 뗀 새로운 음악으로 아이돌과 맞짱 뜰 수 있을까.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예능감각을 키워온 이효리가 예능을 끌고 가는 능력과 음반 활동은 별개”라면서도 “나이든 여성 댄스가수의 귀환은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어려운 길이다.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수용자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져야 한다. 나이든 여성이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해도 참 아름답다고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생겨난다면 이효리는 그 흐름의 선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댄스가수 유랑단’을 통해 이효리는 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늘 첨단 문화트렌드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 자체를 예능화시키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아온 그가 가요사에 또 한 획을 긋게 될까. 적어도 지금 ‘댄스 여가수도 잊혀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새로운 물길을 트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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