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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다큐로 보는 우크라 전쟁의 비극, 6·25의 고통 비추는 거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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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첫 폭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온통 창문 얘기였어요. ‘우리 집 창유리가 다 깨졌어. 창유리 없이 어떻게 살지?’ 하지만 3~5일이 지나가 다들 창문 얘기는 잊었어요. ‘우리 아파트가 폭격을 맞았어, 우리 집은 비껴갔지만. 끔찍해.’ 1주일이 지나자 사람들은 더는 폭격 맞은 집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죽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산부인과 병원과 주택가는 폭격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전 3월 2일에 출산했어요. 이틀 뒤 17구역에 있는 병원이 폭격을 당했어요. 의사들이 수술 중에 숨졌어요.”

“지하실에서 지냈어요. 잠시 발전기가 돌아갈 때만 빼고 온종일 암흑이었죠. 발전기가 돌아갈 때는 모두 휴대폰을 충전하러 달려왔어요. 콘센트가 몇 개 없어서 멀티탭을 연결하고 그 멀티탭에 다른 멀티탭을 주렁주렁 연결했어요. 이미 2~3주 넘게 인터넷도 이동통신망도 안 되는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일종의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폰이 충전되면 조만간 가족과 통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으로 그랬던 거예요.”

생존자 인터뷰 묶은 ‘마리우폴…’
포성과 죽음이 끊이지 않는 곳

멀티탭 뒤엉킨 휴대폰 충전줄
어린이들 피신한 극장도 폭격

“전쟁 끝내는 건 평화보다 승리”
정전 70년 맞은 한국에 큰 울림

내달 폐막 광주비엔날레서 공개

우크라이나 다큐멘터리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의 한 장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쟁 중에 휴대폰을 충전하는 모습. [화면 캡처]

우크라이나 다큐멘터리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의 한 장면. 우크라이나인들이 전쟁 중에 휴대폰을 충전하는 모습. [화면 캡처]

우크라이나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시민들이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처음 한 달 동안 겪은 일이다. 광주비엔날레(7월 9일까지) 우크라이나 파빌리온에서 토요일마다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Mariupol, Unlost Hope)’(2022)에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들이 겪은 참혹한 일들의 서두일 뿐이다.

동시대에 벌어진 비극이기에 70여 년 전 우리 땅의 아픔보다 더 피부에 와 닿는 면도 있다. 폭탄이 쏟아지고 통신망이 끊기면서 휴대폰으로 늘 연결돼 있던 가족·친구와 갑자기 단절되고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상황, 가족과의 연락을 바라며 통신망이 없는데도 필사적으로 폰을 충전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지난달 31일 아침 6시 반, 폰이 찢어지는 비명 같은 경고음을 내며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위급재난문자를 띄웠을 때, 그리고 깜짝 놀라 클릭한 네이버가 먹통이었을 때 (접속 폭주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각 머리에 떠오른 것도 마리우폴의 휴대폰 이야기였다.

러시아군의 드라마 극장 폭격을 그리는 화가. [화면 캡처]

러시아군의 드라마 극장 폭격을 그리는 화가. [화면 캡처]

그때의 경계경보는 우리 역시 언제라도 마리우폴 시민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서울시와 중앙부처 사이의 엇박자와 위급재난문자의 모호한 정보 등 많은 혼란이 노출됐음에도, 이 경계경보를 무심하게 흘려보낸 일부 시민들의 반응이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북한이 인공위성 운반용 로켓이라 밝혔고 발사 날짜 범위도 미리 통보했는데 왜 호들갑을 떨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그 로켓은 위성 대신 탄두를 실으면 곧바로 장거리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북한이 이런 로켓을 발사하는 것 자체를 금지한다. 국제법을 위반한 것인데, 위성 대신 탄두가 실렸을 일은 없다는 북한의 말을 믿으며 발사 당시에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했을까. 곧 6월 25일이 다가오는데 73년 전 그날, 기습 남침을 일으켰고 지금도 무력도발을 계속하는 북한이 그렇게 신뢰할 상대였던가.

6·25가 먼 옛날 일처럼 들린다면 눈앞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을 통해서 다시 보자. 인구 54만 명의 마리우폴은 산업과 문화가 발달한 현대 도시였다. 전쟁이 이런 도시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 포스터. [사진 IMDb]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 포스터. [사진 IMDb]

길거리에 폭격 맞은 시신이 즐비하고 그곳을 걷는 생존자들은 아는 얼굴을 발견할까 봐 두려움에 떤다. 10대 아들을 눈앞에서 잃은 여성은 며칠 후 어떤 남성이 어린 딸의 시신 앞에서 “왜 내가 아니고 너였니?”라고 울부짖는 것을 보며 같은 질문을 되새긴다. 하지만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다. 남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여기저기 지하실을 전전한다. 대형 문화시설이 피신처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례로 드라마 극장이 러시아 공군의 폭격을 맞았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니 폭격하지 말아 달라며 커다랗게 ‘어린이’라고 써놓았는데도 말이다. 최소 600여 명이 사망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점점 지쳐가고, 물과 식량을 놓고 다투고, 절망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한다.

담담한 영상에 담긴 강렬한 충격

이번 다큐는 마리우폴 탈출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주로 엮었다. 관련 영상도 나오지만 가장 참혹한 장면은 편집됐다. 대신 인터뷰 중간중간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배치했다. 화가는 러시아 침공 이전 마리우폴의 활기찬 풍경을 그린 후에 생존자들의 증언에 맞추어 도시가 파괴된 모습을 덧입힌다. 무너진 벽과 검은 재와 연기와 시신들을…. 그렇게 변모한 그림과 담담한 인터뷰는 자극적인 영상보다 더 길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 또한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방식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세계에 자국 상황을 알리기 위해 펴낸 연설집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2023) 서문에 이렇게 썼다. “우크라이나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에 지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인의 용기가 ‘유행이 지난 것’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끝내야 합니다. (…)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우리는 그것이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리’라고 말합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그의 말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그 평화가 침략전쟁으로 깨졌을 때, 침략한 쪽의 책임을 뭉뚱그린 채 평화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사 항전은 전 세계 잠재적 침략 국가들에 전쟁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면으로는 세계 평화에 일조했다. 그렇기에 더욱 우크라이나는 승리해야 한다. 정전 7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도 기억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