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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 관심없는 '어쩌다 검사'…18년째 형사부 고집한 이유 [박성우의 사이드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여기 좀 독특한 검사가 있다. ‘출세 코스’로 여겨지는 특수부나 공안부에는 관심이 없다. 국민 생활과 밀접하지만 귀찮고 황당한 일이 많은 형사부 검사만 18년 째다. 그것도 다들 선호하는 서울 소재 검찰청이 아니라 주로 지방에서…

정명원(45·사법연수원 35기) 대구지검 상주지청장은 스스로를 ‘외곽주의자’라고 부른다. 카페에 가도 건물 바로 앞 넓은 주차공간 대신 주차장 제일 끝에 차를 대고 오는 식이다. “자리가 너무 좋으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라고 한다. 그렇다고 정 지청장이 특수부 수사나 서울 생활에 특별히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남들이 다 좋은 것이라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자신의 목표와 적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다보니 검사가 됐다”는 정 지청장은 요즘 한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 버스터미널에서 검찰청까지 1㎞ 남짓을 걷는 동안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경북 상주에서 그를 만났다.

2021년 펴낸 책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이 화제였어요. 원래 글 쓰는 데 관심이 많았나요.
고등학교 때 문예부 정도? (웃음) 국문과나 국어교육과 가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 진학할 때 보니 어차피 문학이라는 게 사람 사는 얘기인데, 그럼 일단 다른 걸 배우고 그 다음에 문학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왜 검사가 되셨어요?
사법연수원 수료하고 검찰 시보를 하기 전까지는 검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죠. 그런데 시보를 해보니까 여기는 ‘내가 의뢰받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그렇잖아요. 변호사는 의뢰인이 찾아와야 만날 수 있고, 판사도 제한이 있는데 검사는 세상과의 접점이 넓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었어요.
특수부에 대해선 좀 부정적으로 보시나봐요.
아뇨. 제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보는 거지 부정적이지는 않죠. 꼭 필요한 일이고 아주 중요한 일이죠. 
 정명원 대구지검 상주지청장이 상주지청 복도에 걸려있는 검사선서 앞에 서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명원 대구지검 상주지청장이 상주지청 복도에 걸려있는 검사선서 앞에 서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특수부 수사에 대해선 비판적 시선이 있잖아요.
우선 검사들은 자기 사건 아닌 것에 대해서 말하면 안된다는 문화가 있는데, 그건 단순히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건이나 진실이라는 게 겉으로 보여지는 거랑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다만 과거에는 선배들이 모이면 ‘정치인 수사, 특수 수사의 원칙은 뭐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어느 순간 우리가 그 얘기를 안 하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지금은 모든 게 너무 첨예해졌어요, 검찰이나 사회 전반적으로나. 왜 그렇게 됐는지 따지는 건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너무 많은 것들을 형사사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요. 정치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검찰로 들고 오고, 검찰을 계속 욕하면서 모든 문제를 검찰에서 답을 내달라고 하고… 하여간 참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법은 뭐라고 보세요.
제가 무슨 해법이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잘 아는 형사부, 공판 영역에서 후배들한테 위로를 주고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자, 이런 자세로 글도 올리고 책도 쓰고 있어요. 특수부에 대한 꿈이 아주 초기부터 없었고 노선을 빨리 정리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갈등이 별로 없었는데도, 형사부가 찌질하게 취급받는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 같은 게 분명히 있었거든요.
국민 생활과 직결된 건 다 형사부 사건인데 왜 그렇게 됐을까요.
특수부 수사가 언론에 나오고 ‘큰 소리’니까요.

상주지청 앞마당에는 청어무성(聽於無聲)이라는 글귀가 적힌 머릿돌이 있다. ‘소리로 가득 찬 세상, 소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고 뜻풀이가 돼 있다. 정 지청장은 과거 한 일간지 칼럼에 이렇게 썼다.

검찰이 어디를 압수수색했다거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소식은 하루도 빠짐없이 보도되고 그것은 다시 거대한 이슈와 소리가 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검찰의 수사 뉴스와 그에 대한 소리들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소리 폭풍 아래에 있으면 세상에는 오직 소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심각한 착각 속에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일들의 중요함이 문득 잊힌다.

특수부 수사 내용만 부각되고 서민의 삶과 결부된 형사부 사건은 묻힌다는 얘기다.

그냥 ‘큰 소리’에 묻혀 다 쓸려가는 거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검찰을 인식할 때 특수부 검사를 기준으로 인식하더라고요.

수사권 조정 논의 때도 원래 의도는 특수수사를 제한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괜스레 형사부 검사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들이 다 따라 들어갔어요. 그런데 정작 형사부 검사들조차 특수부 논리로 대응하게 되더라는 거죠. 우리가 형사부의 논리로 검찰이라는 조직을 생각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거예요. 말로만 늘 형사부가 중요하다고 하지 그 논리로 누구도 생각을 안 해본 거죠.

정명원 대구지검 상주지청장이 청사 앞마당 '청어무성(聽於無聲)' 머릿돌 앞에서 자신의 책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들어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명원 대구지검 상주지청장이 청사 앞마당 '청어무성(聽於無聲)' 머릿돌 앞에서 자신의 책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들어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큰 소리’가 되지 못한, 작지만 중요한 형사부 사안,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아무래도 지역에 있다보니까 지역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요. 요즘 마음 아프게 보고 있는 부분은 청소년 피해자들이에요. 지방은 서울과 많이 달라요. 서울처럼 아이들이 촘촘하게 관리받지 못해요. 그러다보니 성매매나 불법촬영 같은 어른들의 범행 대상이 되는데, 이 아이들을 그냥 ‘노는 애들’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어요. 부모나 학교의 관심을 못받고 서울이나 다른 데서 온 어른들과 접촉하고 이러면서 범행 대상이 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이 아이들에게는 이런 거 자체를 ‘피해’라고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요. 서울에 있는 똑똑한 애들이었으면 이렇게 안 당했을 것 같아요.

지금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 구형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요. 어차피 ‘노는 애들’이고, 합의를 했다는 이유인데요. 그래서 저희 청에서는 지역적 특성을 좀 고려해야 한다고 해서 높게 구형하고 있어요. 근본적으로는 검찰 밖에서 해법이 있어야겠죠.

국민참여재판에도 전문성이 있으시더라고요.
현재는 피고인만 국민참여재판을 받을지 선택할 수 있는데, 검사가 청구한다든지, 살인이나 특정한 범죄 유형은 국민참여재판으로 한다든지, 좀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배심원들한테 실컷 설명해도 피고인 불쌍하게 생겼다고 무죄 주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회의론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해본 검사들은 본질적인 뿌듯함을 느껴요. 배심원 중에 ‘우리나라 형사사법 시스템 다 썩었어’라고 생각하시던 분들도 직접 재판에 참여해보면 그런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했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가 ‘상주 농약 사이다 살인 사건’인데, 일반 재판을 했어도 결과는 같았겠지만 국민참여재판으로 해서 배심원 만장일치로 결과가 나오니까 사회적인 논란이 해소된 측면이 있어요.

검사, 그것도 지청장이라고 하니까 다들 묵직한 남성을 떠올리지만 정 지청장은 두 아이의 엄마다. 강원도 정선 산골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상상력이 검사로서 자신을 다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요즘은 상상력, 창의력을 키우는 데도 학원을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바쁘기도 하고 확고한 교육 신념이 있지 않아서 그냥 현실과 타협하면서 손을 놓고 있는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원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상상력의 그릇이랄까, 그런 걸 제한하는 일만 안하면 될 것 같아요. 어릴 때 누가 ‘그런 건 다 쓸데없는 생각이야’라고 해서 굉장히 상처가 된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나요.”

검사들이 검찰을 떠날 때 검찰 내부망 ‘e프로스’에 올리는 사직 인사가 천편일률적이라 실망스럽다는 정 지청장은 “그거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못 나가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왠지 그는 정년을 채울 것처럼 보였다.

※사이드바(sidebar)는 미국 법정에서 판사가 재판 진행 상황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 또는 검사나 변호인이 배심원들을 피해 판사에게 직접 얘기하고 싶을 때, 법대 앞에 모여 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문업계 용어로는 메인 기사 옆에 붙는 ‘해설 박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화제의 법조인들을 열심히 만나고, 열심히 해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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