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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나 말고 내 수첩을 믿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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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수첩(手帖). 몸에 지니고 다니며 아무 때나 간단한 기록을 하는 조그마한 공책. 누군가 출판사 대표로 최종의 내 꿈을 물었을 때 김현승 시인의 ‘눈물’ 속 한 구절을 따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 그것이 손때 꺼뭇꺼뭇한 수첩 한 권이었으면 좋겠어요. 하고많은 얘깃거리 중 쓸거리라 생각해 손수 거기 적기까지 했다면 필시 그 나름의 이유가 우리 안에는 있는 거잖아요. 모름지기 그러고 싶어지는, 두부 한 모를 쏙 빼닮은 흰 수첩을 나의 가장 나중 만드는 것으로 염두에 두고는 있어요.”

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왜 하필 두부인가 하면 3년 전 이맘때부터 냉동실에 들어앉은 두부 두 판이 있어서다. 왜 하필 두부인가 하면 3년 전 이맘때부터 침대에 드러누워버린 아빠의 수첩 속 마지막 쓰기가 ‘6월 24일 두부 두 판 7,000원’이라는 기록이어서다. 아빠 쓰러지고 내가 처음 한 일은 그 두부를 냉동실에 얼린 일, 아빠 쓰러지고 내가 다음으로 한 일은 아빠의 수첩을 내 가방 속에 넣은 일. 수첩 속 쓰기가 아니었다면 매주 트럭을 몰고 와 2인분에 6000원짜리 추어탕을 파는 아저씨의 개시 손님으로 아빠가 낙점되어온 사실을 누군들 알았을까.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코로나 종식 이후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입버릇처럼 나누게 되는 말이다. 밤낮없이 전화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참 이상하지, 아무리 막역한 사이더라도 ‘그냥’이라는 ‘사랑’으로 전화를 거는 일에 주저함이 커졌으니 말이다. 대신 그 이름이 떠오를 적마다 수첩 속에 바로바로 적어두기 시작했다. 필시 그 나름의 이유가 내게는 있는 것이니까.

가방을 바꿔 들 때마다 잊지 않고 아빠의 수첩을 옮겨 담는다. 그리고 간간 아빠 수첩에서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책처럼 읽는다. 김민정(○○○동 ○○○호) : 010-○○○-○○○(큰딸. 무지 바쁨. 귀찮게 자꾸 전화 걸지 말 것.) 수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