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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죽어" 전직요원 암살시도…푸틴의 복수, 美까지 뻗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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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지난 2020년 2월 미국 세관 당국은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출국하려던 멕시코 과학자 엑토르 알레한드로 카브레라 푸엔테스와 부인을 긴급 체포했다. 근거는 부인 휴대폰에서 발견된 자동차 번호판 사진이었다. 차량 주인이 미국에 비밀리에 망명한 전직 러시아 고위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포테예프였기 때문이다.

포테예프는 지난 2010년 미국 내에 비밀 스파이망을 만들려는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의 계획을 미 중앙정보국(CIA)에 알렸다. 이에 이민자로 행세하며 미 동부 도시 등에 침투한 11명의 러시아 요원이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미 정보당국에 따르면 푸엔테스와 부인의 활동은 러시아가 2019년 시작한 포테예프 암살 작전의 일부였다. 러시아는 자국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한 푸엔테스를 협박해 작전에 투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포테예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배신자로 여기고 오랫동안 처벌을 다짐한 인물”이라며 “푸틴의 정보요원은 이제 미국 땅에서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선을 넘고 있다”고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 2021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시위대가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암살 시도에 반발해 '푸틴은 암살자'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2021년 4월 영국 런던에서 시위대가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암살 시도에 반발해 '푸틴은 암살자'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는 암살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됐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국이 암살 계획에 반발해 지난 2021년 4월 워싱턴에 있던 대외정보국 책임자를 비롯한 10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자, 모스크바 내 CIA 책임자를 포함해 10명의 미국 외교관을 추방하며 맞불을 놨다. 전직 CIA 유럽·러시아 지부 책임자 마크 폴리머로풀로스는 NYT에 “푸틴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건 없다”며 “그는 자신을 배신한 이들이 모두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포테예프 암살 계획은 그동안 자신의 정적과 배신자들을 암살해 왔다는 의혹을 받는 푸틴 대통령의 악명을 또 다시 확인시켜준 사례다. 푸틴 대통령은 목표로 삼은 대상을 이른바 ‘홍차’로 독살해왔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요원이었던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지난 2006년 영국에서 홍차를 마시고 숨진 이후부터다.

리트비넨코는 KGB 후신 연방보안국(FSB)이 독성물질 연구소를 비밀리에 운영 중이라고 폭로하며 반(反)푸틴 활동을 벌이다 영국으로 망명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해 11월 런던의 한 호텔에서 FSB 요원들과 만나 차를 마신 후 심한 복부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3주 만에 숨졌다. 사망 직전 그의 소변에서 검출된 방사성물질인 ‘폴로늄 210’이 사인으로 지목되면서 ‘푸틴이 방사능 홍차를 보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영국에서 알 수 없는 물질에 노출된 채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 전 러시아군 정보총국 대령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지난 2006년 모스크바 법정에 출두할 때 모습. 타스=연합뉴스

영국에서 알 수 없는 물질에 노출된 채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 전 러시아군 정보총국 대령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지난 2006년 모스크바 법정에 출두할 때 모습. 타스=연합뉴스

최근엔 화학 신경작용제 노비촉으로 암살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노비촉은 소련이 1970~80년대에 개발한 독극물이다. 지난 2018년 영국의 솔즈베리 쇼핑몰에서 러시아와 영국의 이중간첩이었던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독극물 중독 증세로 쓰러졌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미국은 그해 8월 러시아가 노비촉을 사용해 스크리팔을 독살하려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러시아 야권 핵심 인사로 푸틴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적’으로 꼽히는 알렉세이 나발니 역시 지난 2020년 시베리아의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국내선 항공기에 탑승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여객기는 톰스크에서 약 850㎞ 떨어진 옴스크에 긴급 착륙했고, 현지 병원에 입원했던 나발니는 독일로 이송돼 회복했다. 독일 당국은 나발니가 노비촉 계열의 신경작용제에 중독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나발니 측은 아침에 공항에서 유일하게 차를 마셨으며, 차에 노비촉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020년 독극물 테러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오른쪽 둘째)가 당시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부인 율리아(오른쪽), 두 딸과 함께 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AP=연합뉴스

지난 2020년 독극물 테러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오른쪽 둘째)가 당시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부인 율리아(오른쪽), 두 딸과 함께 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AP=연합뉴스

‘푸틴의 홍차’ 는 현재 진행형이다. 러시아 석유 신흥재벌(올리가르히) 출신으로 대표적인 반푸틴 인사로 꼽히는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지난 4월 독일 베를린에서 주최한 한 회의에 참석했다가 독극물 중독 증상을 보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해당 병원은 나발니가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독일 도이체벨레(DW)는 “독일 당국이 해당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푸틴 정부의 암살 시도로 추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러시아는 모든 의혹에 대해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살인으로 단정할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 세계 각국의 수사당국도 푸틴 정권의 소행이라고 의심만 할 뿐이다.

이런 상황을 러시아가 즐긴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 분석가 율리야 이오페는 미 공영방송 NPR에 “잇단 의문스런 죽음의 배후에 크렘린이 있다는 걸 증명할 필요도 없이 의심만 해도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푸틴이 (독살 사건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 안팎의 많은 희생자는 크렘린이 독살을 필요악으로 여긴다고 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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