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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766건, 인정된 적 한번도 없어"...급발진 의심 사망사고에 무죄 선고

중앙일보

입력

급발진 추정 교통 사망사고로 기소된 운전자에게 법원이 자동차 결함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급발진을 인정한 드문 사례로 다른 재판에도 영향이 미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지법 형사5단독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에게 "차량 결함(급발진)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신진호 기자

대전지법 형사5단독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에게 "차량 결함(급발진)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신진호 기자

대전지법 형사5단독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A씨(56)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20일 밝혔다. 김 판사는 “기계적 결함이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A씨에게 과실을 물을 수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A씨는 2020년 12월 29일 오후 3시23분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그랜저TG 를 몰다 경비원 B씨(60)를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운전자 "제동장치·기어 작동하지 않아" 주장

검찰은 “피고인 A씨가 가속장치와 제동장치를 정확하게 조작하지 못해 사고가 났다”며 기소했다. 반면 A씨 측은 “자동차 결함으로 제동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며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기어도 조작되지 않았으며 정지 후에도 시동이 꺼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블랙박스에 담긴 영상을 보면 A씨가 몰던 그랜저TG 승용차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시속 10㎞로 우회전하던 도중 갑자기 가속하면서 주차정산소 차단 막대를 들이받았다. 이어 광장 주변 인도로 올라서서 화분을 들이받은 다음 사람을 치는 사고를 낸 모습이 담겼다. 경비원 B씨는 차가 광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지하려다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치료를 받다 이듬해 1월 숨졌다.

대전지법 형사5단독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에게 "차량 결함(급발진)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당시 상황 모습. [사진 대전지법]

대전지법 형사5단독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에게 "차량 결함(급발진)이 의심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은 당시 상황 모습. [사진 대전지법]

교통사고 분석서에 따르면 가속이 시작되기 전 자동차 속도는 시속 10.5㎞ 정도였다. 이후 우회전을 하면서 속도가 갑자기 37.3㎞, 45.5㎞, 54.1㎞, 63.5㎞로 증가하다 68㎞ 속도로 B씨를 충격한 뒤 보도블록과 보호난간을 들이받고 나서야 속도가 줄었다. 가속이 시작되고 차가 멈추기까지 걸린 시간은 13초 정도다.

법원 "브레이크등 여러 차례 점등, 결함의심 충분"

김정헌 판사는 “교통사고 분석서에 따르면 피고인이 보도블록과 화분을 들이받고서도 가속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13초 동안 계속 밟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과실을 범하는 운전자를 상정하기 어렵다”며 “피해자를 피하려고 방향을 튼 점, 여러 차례 브레이크등이 점등(點燈)된 점 등으로 볼 때 자동차 결함을 의심하기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김 판사는 당시 상황이 A씨가 의도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지 않은 이상 발생할 수 없는 상태로 판단했다. 사고 차에 배우자와 자녀가 동승, A씨가 고의로 과속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무죄 선고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재판부 검토 결과, 가속 페달을 완전히 밟았을 때를 100%로 봤을 때 A씨가 가속페달을 밟은 양은 50% 이하로 추정됐다. A씨 배우자는 법정에 출석,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급발진 가능성을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 첫 재판이 5월 2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부.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 첫 재판이 5월 2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부. 연합뉴스

A씨 변호인은 “그동안 급발진 추정 사고로 운전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사례가 있었지만 1~2건 정도로 극히 드물다”며 “(이번 사고는) 기계적 결함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많았고 피고인 과실이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게 무죄 선고의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13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 인정 사례 없어

한편 지난 13년간 교통안전공단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사고 766건 가운데 인정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차 결함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제조사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첨단 기술이 집적된 자동차 결함을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게 현실이다.

지난해 12월 6일 강원도 강릉에서 할머니가 몰던 차에 탑승했다가 급발진 추정사고로 숨진 고 이도현군 유족은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7억6000만원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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