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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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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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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언제 그랬냐 식으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악연은 2013년 2월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하면서 시작했다. 그때는 시진핑이 201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고 2013년 3월 국가주석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 기간이었다. 혈기 왕성했던 김정은은 시진핑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시진핑은 역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면 관례로 서울보다 먼저 방문했던 평양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2014년 7월 서울을 먼저 찾았다. 정작 평양은 2019년 6월에 방문했다. 김정은이 2018년 3월부터 4차례 중국을 방문한 이후 비로소 시진핑은 평양을 방문했다.

시진핑과 김정은이 가까워진 것은 2018년 3월이다. 3개월 뒤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서다. 중국으로선 북·미 정상회담이 국익 차원에서 민감한 문제였다. 따라서 시진핑은 내키지 않았지만, 김정은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은 2019년 2월 결국 결렬됐고 그 이후 김정은은 한동안 ‘햄릿’이 됐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19로 북‧중 국경이 폐쇄됐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설상가상으로 미·중 갈등이 심화하면서 북한은 어쩔 수 없이 중국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지난 4월 12일 김정은에게 보낸 친서에서 ‘전략적 의사소통’과 ‘전략적 인도’를 강조했다. 시진핑은 “지금 국제 및 지역 정세는 심각하고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며 “나는 김정은 총비서 동지와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중‧조 관계의 발전 방향을 공동으로 인도하겠다”고 밝혔다. 이 친서는 김정은이 시진핑의 국가주석의 3연임을 축하하는 친서를 제일 먼저 보낸 것에 대한 시진핑의 답변이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서로 쳐다보지 않던 북‧중 관계가 지금은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다. 국제정치는 이런 것이다. 생물처럼 언제든지 변한다. 지금의 북‧중 관계도 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시진핑과 김정은의 나이 차이는 31살이다. 시진핑은 70세, 김정은은 39세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를 보면 비슷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덩샤오핑과 김정일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38살이다. 김정일이 1980년 후계자로 공식 발표된 뒤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은 1983년 6월 2일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79세, 김정일은 41세였다.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때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2일 김정일의 첫 방중 40주년을 맞아 ‘조·중 친선의 역사와 전통은 대를 이어 빛날 것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 내용은 “김정일 동지의 역사적인 첫 중국 방문은 피로써 맺어진 조·중 친선의 전통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이정표가 됐다”고 밝혔다. 김정일은 1983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중국을 방문했다.

북한은 왜 북‧중 친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을 소환했을까? 북‧중 친선은 김정일보다 김일성이 더 가까웠는데.

북한이 김정일을 소환하는 것은 김정은에게 지금 필요한 조·중 친선의 대를 잇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북한은 김정일의 첫 방중을 “피로써 맺어지고 역사의 준엄한 사례를 이겨낸 조·중 친선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속 빛내어 나가는 이정표로 됐다”고 평가했다. ‘이정표’를 강조하는 것은 지난 6월 2일 자 노동신문과 똑같다.

김일성이 북‧중 친선을 만들었다면, 김정일은 북‧중 친선의 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대를 이어 빛나게 꽃 피웠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첫 방중을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날 열린 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조·중 친선은 그 어떤 비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 백두산의 소나무와 그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백두산의 천지처럼 불굴의 기상과 깊은 원천을 가진 영구불멸의 친선”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혈기 왕성했던 김정일은 당시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와 달리 덩샤오핑을 비난했다. 개혁‧개방에 몰두하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을 ‘수정주의자’로 지목했다. 중국이 추진하는 4개 현대화 정책을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사회주의권에서 중국을 수정주의로 지목했던 나라는 소련뿐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수정주의’란 말은 적대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후계자인 김정일로부터 이런 모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은 크게 분노했다. 김정일의 등장이 중국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했다.

중국 지도부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김정일의 성격을 걱정했다. 중국이 아무리 설득해도 그에게서 진정한 이해와 협력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 판단하고 김일성을 설득하기로 했다. 덩샤오핑은 김정일이 귀국한 지 3개월이 지난 1983년 9월 중국 다롄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중국과 북한 지도자들은 은밀히 상의할 일을 있을 때는 다롄을 자주 찾았다.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중국의 우려를 전달했고 김일성은 이를 받아들였다. 김일성이 덩샤오핑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세우는 데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설득하면서 “아비인 나는 네가 잘될 수 있도록 어떤 수치도 참고 견디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며 야단을 쳤다. 김정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김일성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국에 ‘사과’를 표시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달랐고 김정일의 ‘반중국 생각’은 그 이후에도 지속했다.

그런 김정일도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집중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1983년 이후 사망(2011년 12월)할 때까지 모두 9차례 방중했지만, 그 가운데 4차례는 2010년 이후다. 2010년 이후 방중할 때 김정일이 김정은을 데리고 갔다는 얘기는 많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김일성처럼 자식을 생각한 김정일이 김정은을 데리고 갔을 가능성은 크다.

지금 북‧중 관계는 김정은 집권 이후 가장 가까워졌다. 한·미 동맹이 강화되면서 비례적으로 그렇게 됐다. 지난 4월 평양에 부임한 왕야쥔 주북한 중국대사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광폭 행보’라고 할 정도로 몇 달 사이에 김정은을 제외한 북한의 주요 인사들을 거의 만났다.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김덕훈 내각 총리‧김성남 당국제부장‧최선희 외무상‧윤정호 대외경제상‧승정규 문화상 등과 인사를 나눴다.

이 가운데 김덕훈‧최용해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권력 서열 2위‧4위에 해당한다. 리용남 주중 북한대사가 왕이 국무위원을 만났다는 얘기는 있어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만났다는 얘기는 없다. 그만큼 북한이 중국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미‧중 갈등이 깊어지면 한국은 미국, 북한은 중국과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반도의 운명이다. 이런 지정학적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한‧중 관계 개선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일장춘몽이었나 싶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에서 ‘전략적 명확성’으로 가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시간만이 증명할 것이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질 무렵 비로소 그 날개를 편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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