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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기술 선도국을 기대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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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지난 3월의 서울대 입학식에서 축사를 맡았다.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그만큼 오랫동안 고민했다. 밤잠을 설치고, 고쳐 쓰기를 거듭한 끝에, 수많은 당부를 다 버리고서도 남는 딱 한 문장이 뭘까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목을 정했다. ‘교과서를 버려라.’ 아이작 뉴턴이 1687년 중력의 법칙을 담은 역작 『프린키피아』를 발표하고 나서 근대적 의미의 물리학이 탄생했다. 뉴턴의 이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교과서로서 물리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이 교과서에 들어맞지 않는 증거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고, 다른 설명논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처럼 질문했던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었고, 결국 기존의 교과서는 다시 쓰였다.

교과서는 만고불변 진리 아냐
교과서 추종 추격국서 벗어나
선도국 변신 꿈꾸는 대한한국
정답 일단 의심하고 질문해야

‘삼각형 세 각 합 180도’는 조건적 진리

근대 물리학의 탄생을 알린 아이작 뉴턴의 역작 『프린키피아』(1687).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중앙포토]

근대 물리학의 탄생을 알린 아이작 뉴턴의 역작 『프린키피아』(1687).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중앙포토]

뉴턴의 이론을 포함해 우리 눈앞에 있는 교과서의 이야기들은 결코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맞다고 생각한 잠정적인 가설의 모음일 따름이다. 삼각형의 세 각을 합하면 180도라는 이야기는 어떤가. 이것도 평면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오목한 말안장 위에 그린 삼각형의 세 각 합은 180도보다 작고, 볼록한 지구본 위의 삼각형의 경우에는 반대로 180도보다 크다. 그래서 삼각형의 세 각 합이 180도라는 법칙도 평면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성립하는 조건적 진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이론은 맥락적이기도 하다. 애덤 스미스나 케인스의 경제학 이론은 당시 자신이 경험했던 국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담은 주장이다. 그래서 교과서에 실려있는 이론을 접할 때 주장하는 사람이 처해 있던 당시의 맥락을 제거하고 마치 객관적 법칙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죽은 화석을 보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교과서는 단지 잠정적이고, 조건적이며, 맥락적인 가설과 주장을 담고 있을 뿐 결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교과서의 내용은 틀릴 수도 있고, 구부러질 수도 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고쳐질 수 있다. 교과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잠정적으로 합의한 발자국의 마지막 경계는 보여줄지언정 그 경계 밖에 어떤 새로운 발자국이 찍힐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새로운 교과서는 판례를 쌓아가듯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축적하는 가운데 다시 쓰인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교과서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으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고, 그 덕분에 교과서는 쉼 없이 새로 고쳐지고 있다.

교과서를 쓰는 기술 선도국과 교과서를 수용하는 추격국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기술 선도국은 교과서적 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으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다. 그 결과 기존과 다른 새로운 교과서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국가다. 뒤늦게 출발한 추격국은 기술 선도국에서 정립된 교과서를 번역하고, 수용해서, 적용하는 국가다.

우리는 지난 70년간 추격국으로서 기술 선도국이 쌓아 만든 교과서를 충실히 익히고 더 열심히 실행하는 것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공스토리를 써왔다.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추격국이 아니라 선도국으로서 교과서에 도전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의 교과서를 매번 새롭게 써나가고 있는 사례는 말할 것도 없다. K팝은 대중가요가 만들어지는 기존의 논리와 다른 장르를 만들어냄으로써 많은 나라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풀리지 않는 난제에 도전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한 수학자가 등장하고, 미래 통신 플랫폼인 6G의 밑그림을 그리는 국제표준화기구를 이끄는 역할도 한국이 맡고 있다. 우리 사회 여러 곳에서 아직 지도가 없는 흰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내보겠다고 덤벼드는 사례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모두 추격국에서 선도국으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귀한 길잡이 반딧불이다.

‘서울대에서 A+를 받는 비법’ 충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추격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곳곳에서 짙게 드리워져 있다. 몇 년 전 ‘서울대에서 A+를 받는 비법’이라는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농담까지 철저히 필기하고, 교과서와 교수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고, 빈틈없이 암기하는 것이 비법이었다. 교과서와 교수의 논리를 질문 없이 수용해야 좋은 성과가 나오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교과서가 탄생할 수 없다. 교실에서뿐만 아니다.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를 도입하려다 좌초된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새로운 기업가적 시도가 제도적 경직성이나 촘촘한 기존 이해관계망에 짓눌려 원천 봉쇄되는 환경에서는 기존의 교과서와 다른 혁신적 신산업을 기대하기 어렵다.

추격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뚫고 하나둘 반짝이는 반딧불이 날아오르는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진정한 선도국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 출발은 최초의 질문이다. 이것이 정답이라거나 교과서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일단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다른 관점과 판단 기준, 다른 대안적 세상에 대한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손을 들어야 한다. 그런 최초의 질문이 제기되면, 힘겹게 날아오르는 반딧불이를 반가워하고 소중히 감싸 안듯, 장하다고 칭찬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선도국으로서 우리가 다시 쓸 교과서의 귀한 싹이기 때문이다. 이제 선도국으로서의 한국이 던지는 최초의 질문을 찾고, 널리 알리고, 격려해야 한다. 그 여정을 시작할 때다.

※베스트셀러 『축적의 시간』을 기획하고 본지에 같은 이름의 칼럼을 썼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가 5주마다 ‘최초의 질문’이란 제목으로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