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저우언라이 “일본문제 연구기관 만들라”…대일공작위 출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9〉

1972년 9월 27일 밤 중난하이(中南海)의 마오쩌둥 서재. 오른쪽부터 랴오청즈, 일본 관방장관 니카이도, 외상 오히라, 다나카 총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 지펑페이(姬鵬飛). [사진 김명호]

1972년 9월 27일 밤 중난하이(中南海)의 마오쩌둥 서재. 오른쪽부터 랴오청즈, 일본 관방장관 니카이도, 외상 오히라, 다나카 총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 지펑페이(姬鵬飛). [사진 김명호]

6·25전쟁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하던 1952년 4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총통 장제스는 일본관련 정책을 직접 관장했다. 집행은 국책고문 장췬(張群·장군)이 맡았다. 장은 일본 정·관계에 지인들이 많았다. 걸림돌이 없었다. 일본 정계에 친대만파가 득실거렸다. 대륙의 중공정권도 일본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았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측근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에게 지시했다. “일본문제 연구 기관을 만들어라.”

닉슨 “중 지도자, 오밤중 회의 습관”

마오쩌둥은 다나카에게 주희(朱熹)가 주석(註釋)한 애국시인 굴원(屈原)의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선물했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다나카에게 주희(朱熹)가 주석(註釋)한 애국시인 굴원(屈原)의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선물했다. [사진 김명호]

국민당 좌파의 영수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와 허샹닝(何香凝·하향응)의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난 랴오청즈는 망명객 쑨원(孫文·손문)의 무릎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교육도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일본에서 받은 일본통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로라하는 혁명가들의 안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웬만한 고생은 고생으로 치지도 않는 낙천가였다. 조직력과 수완도 남달랐다. 약관의 나이에 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파업을 주도할 정도였다. 대륙은 물론 미국, 홍콩, 일본, 유럽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친인척들이 부지기수였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청년시절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2년 어린 장징궈가 배고파하면 만두 사주고,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줬다.

중공은 일본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일본 연구에 투입할 인력은 차고 넘쳤다. 당 중앙에 일본관계만 전담할 외사조(外事組)를 출범시켰다. 조장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陳毅·진의), 부조장은 랴오청즈가 맡았다. 국무원이 차린 외사판공실(外事辦公室)도 주임은 천이, 부주임은 랴오청즈였다. 랴오의 조직력이 빛을 발했다. 일본 연구와 대일정책 기획 및 집행을 전담할 ‘대일공작위원회’를 만들었다. 주임에 지일파(知日派) 궈뭐뤄(郭沫若·곽말약)를 추대했다. 사회과학원 원장 궈는 유명한 훈수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 학계와 문화계에 명성이 자자한 문·사·철의 대가였다. 쓸모가 있었다. 여기서도 랴오는 부주임이었다. 다른 부주임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외교부장 조리(차관보 급), 적십자 회장, 대외무역부 부장, 전국총공회 부주석 등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름을 올렸다. 상임부주임 랴오청즈의 권한은 막강했다. 필요 시 당·정부 기관과 언론매체의 간부들을 징발할 수 있었다.

랴오청즈가 이끈 ‘대일공작위원회’는 중·일관계 정상화의 초석을 깔았다. 뒷구멍으로 온갖 공작을폈다. 1953년부터 1975년까지 22년간 일본 각 분야의 대표단을 295차례 중국으로 초청했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만나 악수하고 밥 먹은 일본인이 3000명에 조금 못 미쳤다. 접견대상도 정당대표와 기업인 외에 노동단체, 여성단체, 청년단체 등 각양각색이었다. 통역이 구술을 남겼다. “도로포장 노동자와 청년, 교사로 구성된 대형 단체가 베이징에 온 적이 있었다. 총리는 오랜 시간 대화 나누고 만찬도 함께했다. 총 8시간이 걸렸다. 만찬을 마친 총리는 차에 오르자 고개 뒤로 젖히며 잠시 졸았다. 피곤해하는 모습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울컥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자 랴오 동지도 눈시울을 붉혔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번쩍 뜬 저우가 랴오에게 지시했다. “대표단 단장 편에 외상 후쿠다에게 선물을 보내고 싶다. 치궁(啓功·계공)에게 내 말을 전해라.” 후쿠다는 한학(漢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평소 치궁의 문장과 글씨를 좋아했다. 저우언라이의 선물인 치궁의 작품 ‘여주재연(如珠在淵)’ 4자를 집무실 벽 정면에 걸어 놓고 즐거워했다. 당시 후쿠다는 자민당의 친대만파 영수였다.

저우, 직접 만난 일본인만 3000명

중·일수교 2년 후 ‘중·일 우호의 배’를 타고 나고야에 도착해 율동을 따라 하는 랴오청즈. 오른쪽은 중공 개국대장 쑤위(粟裕). [사진 김명호]

중·일수교 2년 후 ‘중·일 우호의 배’를 타고 나고야에 도착해 율동을 따라 하는 랴오청즈. 오른쪽은 중공 개국대장 쑤위(粟裕). [사진 김명호]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친미 일변도였던 사토가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중국과 수교를 주장하던 다나카의 말에 힘이 실렸다. 후쿠다를 누르고 총리에 취임했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토목기사 출신 서민재상, 현대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에 일본열도가 환호했다. 다나카는 유능한 건설업자로 입신한 사람다웠다. 언행이 일치하고 민첩했다. 1차 각료회의에서 일·중수교와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갔다. 닉슨에게 양해와 자문을 구했다. 닉슨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외국인과 오밤중에 회의하는 습관이 있다. 9시 이후에는 취침해야 한다며 미리 양해를 구해라. 저 사람들 하자는 대로 했다간 머리가 산만해져서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7월 16일, 저우언라이도 베이징을 방문한 일본 정치인 편에 답을 보냈다. “현 일본 총리나 대신(大臣)이 관계 회복을 위해 중국에 올 의향이 있으면 언제건 베이징 공항을 개방하겠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양국을 오갔다. 9월 21일 양국이 동시에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다나카 총리가 저우 총리의 방문요청을 수락했다. 양국의 관계 정상화와 우호를 건립하기 위해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을 방문한다.” 동북아는 물론 세계가 진동할 징조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