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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하라 당했다" 이름 걸던 전통 사라진다…명찰 감추는 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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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 도쿄의 한 편의점 점장 A(60)씨는 아르바이트 직원의 실명을 거론하며 쓴 악성 리뷰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구글맵 점포 평가란에 "여자가 애교도 없이…이런 인간이 계산대에 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 직원 실명은 작업복 명찰을 보고 파악한 것으로 보였다. A씨는 구글 측에 삭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실질적 피해가 없어 지울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결국 강제로 '실명 공개'를 당한 직원은 건강이 악화했다며 일을 그만뒀다. 고객이 직원을 괴롭히는 '카스하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일본에서 직원 명찰에 이름과 성 전부를 적는 대신, 이니셜 기재 등으로 직원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셔터스톡

일본에서 직원 명찰에 이름과 성 전부를 적는 대신, 이니셜 기재 등으로 직원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셔터스톡

#도쿄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B(36)씨는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않은 환자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로 식사 초대를 받았다. B씨는 "간호사복 앞섶에 달린 명찰을 보고 페북에서 이름을 찾아봤다"는 설명에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그는 요미우리신문에 "다른 환자들도 내 명찰을 보고 SNS에서 이름을 검색할 수 있다 생각하니 무섭다"고 털어놨다.

일본 털리스 커피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직함과 영문 이니셜을 표기한 명찰을 달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일본 털리스 커피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직함과 영문 이니셜을 표기한 명찰을 달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이처럼 일본에서 업무 중에 패용하는 명찰 때문에 프라이버시 침해가 벌어지자 성(姓)과 이름을 다 적는 '풀네임' 표기 대신 성과 이름 중 하나만 쓰거나 영문 이니셜만 적도록 해 직원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지자체들이 대표적이다. 일본 규슈(九州) 사가(佐賀)시는 최근 시 공무원 명찰에 성과 이름 대신 성만 쓰도록 했다. 전체 이름이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라면 이름을 뺀 성 '다나카(田中)'만 쓰는 식이다.

사가시는 "이름을 걸고 사명감 있게 일하자"는 취지로 2001년부터 실명 명찰을 써왔다. 하지만 "검색 몇 번으로 프라이버시를 쉽게 침해하는 시대에 직원 사생활을 지켜 달라"는 요구가 높아지자 성만 쓰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치(愛知)현의 일부 도시에서는 성만 쓰고 그마저도 한자 대신 일본어 표기방식인 '히라가나'로 갈음하는 사례도 나왔다.

요미우리신문이 지방정부 20곳을 조사한 결과 전체 성명 표기는 8곳, 성만 표기하는 곳은 12곳으로 성만 표기하는 방식이 더 많았다.

일본 사가 시는 이름과 성을 전부 적는 대신 성만 쓰는 방식으로 명찰을 바꾸기로 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일본 사가 시는 이름과 성을 전부 적는 대신 성만 쓰는 방식으로 명찰을 바꾸기로 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지자체가 이런 조처를 한 이유는 악성 민원인의 괴롭힘 때문이다. 신문에 따르면 몇몇 민원인들이 명찰에 적힌 공무원 이름을 기억했다가 SNS에서 해당 공무원을 찾아 괴롭힌 사례가 있었다. 예컨대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너 ○○(장소)에 갔었지'라며 스토킹에 준하는 SNS 메시지를 보내는 식이다. 또 공무원의 업무 처리에 불만을 품은 민원인이 인터넷 전체 공개 글에서 공무원의 신상·사진을 까발리는 등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도 발생했다.

특히 민감한 세금 문제나 건축 허가 등을 맡은 부서 직원 중에는 공개된 실명을 통해 개인 정보를 캐낸 민원인으로부터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일본 언론은 "이름·주소지 등 개인 정보가 악용되면 범죄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카페 "영문 이니셜"…日약국 "성만 써도 OK" 

직원 성명을 감추는 사례는 민간 기업에도 있다. 일본 760곳에서 점포를 운영 중인 '털리스 커피 재팬'은 한자와 로마자 표기(田中敬子·Tanaka Keiko)를 다 쓰다가 지난해부터 성과 이름 이니셜(T.K)로 바꿨다. 업체는 "아르바이트 학생 등 어린 직원도 안심하고 일하게 제도를 바꾸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국의 경우, 스타벅스 등 커피체인점에선 고객을 상대하는 파트너들이 영문명 명찰을 달고 있다.

일본 최대 드럭스토어인 마쓰모토 기요시 등 일부 대기업도 성만 쓰는 명찰로 변경됐다. 소매업계에서는 '점장', '파트(타임 직원)' 등 직함이나 담당 업무만 기재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일본에서 점포 760곳을 운영하는 털리스 커피 재팬은 직원의 이니셜만 기재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일본에서 점포 760곳을 운영하는 털리스 커피 재팬은 직원의 이니셜만 기재하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이름 거는 日 '명찰 문화', 갑질에 사라져 

전통적으로 일본은 자기 이름을 걸고 장사를 하거나 상품을 팔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명찰 문화'가 뿌리 깊다. 하지만 고객 갑질과 프라이버시 보호 추세는 명찰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생노동성은 과거 약사들을 상대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체 성명을 기재하라"고 권장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6월 스토커 피해나 카스하라(고객 괴롭힘)을 막는 차원에서 성만 표기해도 된다는 공지를 내렸다.

일본 버스·택시·철도 등 운송수단 종사자들의 의무였던 운전사와 승무원의 전체 성명 기재도 올여름부터 회사 자율에 맡기는 방식으로 바뀐다. 일본 국토교통성 관계자는 요미우리에 "시대 변화에 맞춰 기사가 안심하고 일하는 환경을 마련하겠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버스·택시는 도로운송법에 근거해 운전자·승무원 이름을 승객이 보기 쉽도록 차내에 게시하는 게 의무다. 택시의 경우 기사 이름·사진이 나온 증명서가 조수석 앞에 설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철도회사도 전체 성명을 기재한 명찰 패용이 의무다.

일본 택시의 경우 기사 이름·사진이 나온 증명서가 조수석 앞에 설치되어 있다. 사진 가나가와 택시 센터 홈페이지 캡처

일본 택시의 경우 기사 이름·사진이 나온 증명서가 조수석 앞에 설치되어 있다. 사진 가나가와 택시 센터 홈페이지 캡처

그러나 취객 등이 스마트폰으로 이를 촬영해 가는 일이 잦자 업계 종사자 사이에서는 "언제든 내 신상이 SNS에 올라갈 수 있다"며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전(全)일본교통운수산업 노동조합협의회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2만1000명 중 46.6%가 "최근 2년 이내에 승객에 의한 괴롭힘으로 피해를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일본 해러스먼트(괴롭힘)협회의 무라사키 가나메(村嵜要) 대표이사는 아사히신문에 "명찰은 문제 발생 시 담당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소비자 보호 기능이 있지만, SNS가 활발한 지금에는 단점도 있다"면서 "직원 이름·사진이 불필요하게 인터넷에 노출되지 않도록 기업이 직원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韓 전문가 "실명 명찰, 득보다 실" 

한국에서도 고객·민원인과 직접 상대하는 직원을 겨냥한 갑질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으로부터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명찰 착용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국 개인정보보호(CPO)포럼 회장인 정태명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식당·편의점 등에서 실명 명찰을 달았던 것은 한 공간에서 직원을 특정해 도움을 받기 위함인데 닉네임 등으로 불러도 얼마든지 특정된다"면서 "실명 표기를 했을 때 득보다 실이 크다"고 전했다.

법무법인 LF의 이경민 형사변호사는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진 요즘, 국내 기업도 직원 신상 정보가 악용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국내법에서는 실명을 통해 직원의 주소·연락처 등을 알아낸 뒤 접근하거나 집요하게 연락한다면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법무부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스토킹, 개인정보 사진 유포 등에 대해 강력한 처벌이 적용되는 내용을 담은 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또한 고객이 직원 신상과 함께 폄하·욕설 등이 담긴 글을 SNS에 올리면 모욕죄·명예훼손죄로 처벌 대상이다. 직원 실명과 계좌번호 등 내밀한 정보를 SNS에 무단으로 올리면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이경민 변호사는 "초범의 경우 수백만 원대의 벌금형이고 반복되면 처벌 수위가 높아진다"고 전했다.

단, 실명 공개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법무법인 린의 구태언 변호사는 "금융기관 등 일부 직종에선 직원 실명을 공개할 필요성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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