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중국의 보이지 않는 ‘초한전’…시간·수단 안 가리는 무한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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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외교안보부장

이철재 외교안보부장

한·중 관계가 심상찮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대사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 등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한국과 중국 정부는 상대 대사를 초치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외교관으로서 상호 존중이나 우호 증진의 태도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여권에선 싱 대사의 강제추방을 요구했다. 한국의 강경한 입장에도 중국은 싱 대사에 대한 징계나 대사 교체 등의 조치를 사실상 거부했다. 싱 대사의 외교적 결례는 세게 윽박지르는 중국 전랑(戰狼·늑대 전사) 외교의 민낯이다.

싱하이밍 ‘외교적 결례’ 물의
한국 내 여론 갈리치기 노림수
심리·정보·여론전 등 모두 동원
한국을 영향권에 두려는 속셈

중국 관변단체들의 은밀한 ‘초청’

2017년 ‘사드 사태’ 때 문 닫은 중국 롯데마트. 당시 정부 규제와 여론 악화로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철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7년 ‘사드 사태’ 때 문 닫은 중국 롯데마트. 당시 정부 규제와 여론 악화로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철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내 일각에선 한국이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에만 신경 쓰면서 중국에 소홀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에 대해 한국세계지역학회 회장인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는 “‘한국 책임론’은 중국의 영향력 공작 영향”이라며 “중국은 균형 외교를 추구하는 야당 대표를 부르면서 국내 여론의 갈라치기를 노렸을 테고, 일부 효과를 보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익명의 중국 연구자는 “최근 중국 측 인사가 3박 4일 상하이(上海)에서 열릴 비공개 세미나에 초청했는데 모든 비용이 공짜라고 했다. 그 인사의 소속 단체를 알아보니 중국 정부 기관과 연계돼 정중히 거절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우호’ ‘문화교류’ ‘교육기금’ 등을 표방한 중국 단체들이 한국의 연구자·언론인·정치인에게 세미나, 친선 방문이나 단기 연수 등을 제안하고 있다.  또 비즈니스 혜택을 미끼로 한국 기업에 다가서고 있다. 중국이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재우 교수는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교전 중”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심리전, 정보전, 여론전, 인지전, 회색지대 전략, 하이브리드 전쟁, 샤프 파워 전략 등.

회색지대(Gray Zone) 전략은 실제 무력 분쟁이나 전쟁으로 확대하지 않도록 의도를 감추면서도 점진적 방식으로 안보 목표를 이루려 한다. 하이브리드(Hybrid) 전쟁은 테러·범죄·사이버 공격 등 비군사적 작전을 군사적 작전과 동시에 복합적으로 전개한다. 샤프 파워(Sharp Power) 전략은 회유·협박·여론 조작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냉전 초기 ‘미스터 엑스(X)’라는 필명으로 소련의 팽창주의를 꿰뚫고 봉쇄정책을 제안한 미국의 전략가 조지 케넌은 1948년 ‘조직적인 정치전의 개시’라는 국무부 내부 문건에서 ‘정치전(Political Warfare)’의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정치전을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전쟁 없이도 국가의 지휘 하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며 소련은 미국과 서방 세계에 다양한 정치전을 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21세기 중국은 20세기 소련을 따라 하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전시와 평시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 전략적 사고관을 갖고 있다. “싸우지 않고서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용병법(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는 『손자병법』의 대목이 대표적이다.  중국에 평시는 전쟁 수단과 수행 방식이 다른 전시일 뿐이다.

중국은 더 교묘하고 더 무서운 중국식 정치전을 발전시켰다. 중국의 전략가인 차오량(喬良)과 왕샹수이(王湘穗)는 1999년 『초한전(超限戰)』에서 모든 경계와 한계를 뛰어넘는 전쟁(초한전)을 내세웠다. 초한전은 선전포고가 없고, 전투와 전쟁터는 눈에 안 보인다. 무역·금융·생태·심리·여론·기술·자원·문화 등에서 주가 폭락, 컴퓨터 바이러스 침입, 환율의 이상 동향, 정치적 스캔들 유포 등 비군사 전쟁 행위로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2017년 고고도 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를 놓고 한국과 갈등을 겪을 때 초한전을 구사했다. 사드 부지를 내준 롯데그룹을 괴롭히고, 한국 콘텐트의 수입을 비공식적으로 막는 한한령(限韓令)을 내리며, 관영 매체를 총동원해 중국 내 반한(反韓)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초한전에선 그 누구도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는다. 동시에 상대를 이기기 위해선 물질·정신·기술적 문제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리적 고민은 초한전에서 사치다. 그래서 초한전의 파괴와 고통은 일반 전쟁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게 차오량·왕샹수이의 설명이다.

회유와 협박은 중국 이미지 악화

중국이 초한전으로 달성하려는 전략적 목표는 분명하다. 주재우 교수는 “한국은 중국의 제1도련선(태평양의 섬을 가상으로 사슬처럼 이은 선) 안쪽의 중요 지점에 있다”며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이뤄내 중국은 한국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려고 한다. 조선처럼 조공국으로 삼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의 초한전은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되레 멀어지게 하고 있다. 중앙일보·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지난해 12월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중국의 호감도는 전체 20개 국가에서 19위였다. 이 조사에서 꼴찌는 북한이었다. 중국에 대한 불신 비율은 93.5%를 기록했다.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은 “중국을 믿을 수 없다”고 반응한 셈이다.

중국의 이미지가 가뜩이나 안 좋은데 중국이 초한전을 고집한다면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중국에 당장 필요한 것은 한국인의 마음을 강제로 열려는 샤프 파워보다 한국인의 마음을 저절로 사는 소프트 파워다. 그 시작은 중국이 상호 존중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