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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회숙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반복과 크레센도 그 관능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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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회숙 음악평론가

진회숙 음악평론가

라벨의 ‘볼레로’는 관능적인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리듬에 맞추어 18번이나 반복하는데,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면 지루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반복하는 동안 악기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음량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듣다 보면 은근히 음악에 중독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주에 참여하는 악기에는 오케스트라에 있는 통상적인 악기 외에 스페인 춤곡인 볼레로의 관능적인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색소폰이 필요하다. 먼저 플루트 독주로 시작해 클라리넷, 파곳,  Eb 클라리넷, 오보에 다모레, 플루트와 트럼펫, 테너 색소폰, 소프라니노 색소폰과 소프라노 색소폰, 혼과 피콜로와 첼레스타, 오보에와 오보에 다모레와 잉글리쉬 혼 그리고 클라리넷, 그다음 트롬본, 목관 앙상블, 현악기, 현악기와 트럼펫, 오케스트라 전체로 끝을 맺는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처음에는 피아니시모로 조용하게 시작했다가 뒤로 갈수록 악기들이 합쳐지면서 소리가 점점 커져 마지막에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엄청나게 큰소리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음량이 확장되는 동안에도 드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같은 리듬을 반복한다.

‘볼레로’는 크레센도의 음악이다. 반복적인 리듬의 토대 위에 구현되는 악상의 점진적인 고양. 하지만 그 점진적인 고양에는 해결이 없다. 사람의 감정을 저 높은 곳까지 올려놓은 다음, 이를 수습하지 않고 마지막에 그냥 폭발해 버린다. 그동안 서양 작곡가들이 얼마나 종결구에 공을 들였는가를 생각하면 라벨의 갑작스러운 종결방식은 무책임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사실 작곡가인 라벨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듣는 이의 감정을 꼭대기까지 올려놓았으니 그다음에 무슨 해결방법이 있겠는가. 그저 속수무책으로 폭발하는 수밖에.

진회숙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