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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 중개상"…현대판 '책쾌' 연못 위 도서관에 모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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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장수 ‘책쾌’ 

안녕하시오. 나는 ‘책쾌(冊儈)’요. 처음 들어보는 이가 대부분일 거요. 서점업이 금지된 조선시대 때 책을 사고팔던 ‘서적 중개상(거간꾼)’을 말하오. 맞소. 책장수요.

한자 ‘쾌’가 흥정을 붙이는 거간꾼이란 뜻이오. 참고로 당시 집을 팔던 부동산업자는 가쾌(家儈), 시장을 돌아다니며 과일·나무를 팔던 사람은 장쾌(駔儈)라 불렀소.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 연못 위에 세워진 연화정도서관. [사진 전주시]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 연못 위에 세워진 연화정도서관.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개최…“독립출판 박람회”

우리는 옷소매와 품속에 책을 넣고 전국 각지를 뛰어다녔다오. 단순히 책만 팔지 않았소. 요즘으로 치면 다재다능한 ‘책 엔터테이너’에 가까웠다오.

머릿속에 좋은 책 목록을 꿰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추천하는 북큐레이터 겸 마케터이자 직접 목판을 찍어 책을 만들던 독립출판인 겸 출판기획자였소.

그러나 고초도 심했다오. 영조 땐 왕의 역사를 왜곡한 책을 팔았다는 이유로 책쾌 100여 명이 몰살당한 사건도 있었소.

최근 반가운 소식을 들었소. 우리 직업이 사라진 지 거의 100년 만에 ‘현대판 책쾌’가 모이는 도서 박람회가 열린다지 뭐요. 전국에서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독립출판인과 소규모 출판사, 독립서점 등 67개 팀이 책을 사고파는 행사라오.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 포스터.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 포스터. [사진 전주시]

독립출판인·서점 등 67개 팀 참여 

이름하여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 전주시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후원하는 이 행사는 다음 달 1일부터 2일까지 전북 전주시 연화정도서관에서 열린다고 하오.

전주에도 ‘독립출판’만을 내세운 도서 박람회가 생긴 것이오. 개인이나 소수 그룹이 기획·편집·인쇄해 책을 내는 ‘독립출판’은 그 자체가 독자적 장르이자 문화라오. 아울러 조선시대 ‘책쾌’가 부활하는 의미도 크오.

지난해 6월 문을 연 연화정도서관은 연꽃으로 유명한 전주 덕진공원 연못 한복판에 ‘ㄱ’자 형태 한옥으로 지어졌소. 바로 이 ‘연못 위 도서관’에 ‘현대판 책쾌’들이 모인다니 감개무량하오. 더구나 7월은 연꽃이 만개하는 시기요. 책도 보고 꽃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소.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 홍보 영상 캡처. 비걸 신설빈(후디)이 도서 박람회가 열리는 연화정도서관 앞에서 갓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딥플로우 노래 '작두'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 홍보 영상 캡처. 비걸 신설빈(후디)이 도서 박람회가 열리는 연화정도서관 앞에서 갓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딥플로우 노래 '작두'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사진 전주시]

『조선직업실록』정명섭 작가 등 강연 

‘현대판 책쾌’들에게 이번 박람회는 ‘교류의 장’이자 ‘출판물 유통 플랫폼’이 될 터. 각자 시·소설·인문서·그림책·사진집 등 신작을 선보이고 작업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눈다고 하오.

‘책쾌’의 가치와 중요성을 조명하는 행사도 준비됐소. 역사 속에 잊힌 조선시대 별난 직업들을 다룬 『조선직업실록』 저자 정명섭 작가 등이 버스 안에서 강연하는 프로그램 등이오.

개인 전용기를 연상케 하는 버스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빌렸소. 강연은 90분, 정원은 15명이오. 독립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 강영규 대표와 영화 잡지 ‘프리즘오브’ 유진선 편집장도 만날 수 있소.

다음 달 1일부터 2일까지 전주시 연화정도서관에서 열리는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에서 강연자로 나서는 '프리즘오브' 유진선(왼쪽부터) 편집장과 『조선직업실록』 저자 정명섭 작가, 독립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 강영규 대표. [사진 전주시]

다음 달 1일부터 2일까지 전주시 연화정도서관에서 열리는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에서 강연자로 나서는 '프리즘오브' 유진선(왼쪽부터) 편집장과 『조선직업실록』 저자 정명섭 작가, 독립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 강영규 대표. [사진 전주시]

조선 ‘완판본’ 등 출판 문화 융성 

이벤트도 풍성하오. 갓·선글라스·도포를 빌려 입고 ‘책쾌’ 모습으로 ‘인증샷’을 찍을 수 있고, ‘책쾌’ 캐릭터가 그려진 엽서에 색깔을 칠한 뒤 가져갈 수도 있소. ‘책쾌’ 분장을 한 사람이 돌아다닐 테니 언제든 말도 걸고 함께 사진도 촬영하시오.

문득 ‘왜 전주일까’란 생각이 들지 않소. 전주가 조선시대 출판 문화를 이끈 ‘책의 도시’라는 사실을 아시오. 조선 3대 도시였던 전주는 옛 서점인 서포(書舖)와 완판본(完板本) 등 출판 문화가 융성한 곳이라오.

전주시 연화정도서관 외경. [사진 전주시]

전주시 연화정도서관 외경. [사진 전주시]

MZ세대 ‘도서관 여행’ 주목 

완판본은 조선 후기 전주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간행한 서적을 말하오. 완판본 최초 목판 한글 소설은 1823년 간행된 『별월봉기』요. 이후 『열여춘향슈절가』 『심청전』 『적벽가』 『토별가』 등이 줄줄이 나왔소.

최근 전주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얼·Z세대 통칭) 사이에서 ‘도서관 여행’으로 주목받고 있소. 전주시가 운영하는 ▶서학예술마을도서관 ▶이팝나무 그림책도서관 ▶학산 숲속 시집도서관 ▶전주시립도서관 꽃심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 등은 전국적인 인문·관광 콘텐트가 됐다오.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를 구상하고 준비한 임주아(가운데) 총괄기획자와 이승희(왼쪽)·이명규 프로그래머.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를 구상하고 준비한 임주아(가운데) 총괄기획자와 이승희(왼쪽)·이명규 프로그래머. [사진 전주시]

임주아·이승희·이명규 ‘30대 책쾌’ 기획  

이번 박람회를 기획하고 준비한 이들은 30대 청년이오. 임주아 총괄기획자와 이승희·이명규 프로그래머요.

이들 자신이 쟁쟁한 실력을 갖춘 ‘책쾌’라오. 임주아 총괄기획자는 성매매 집결지 전주 서노송예술촌(옛 선미촌)에서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는 시인이오. 2019년 1월 화가·성악가 등 동료 예술가들과 의기투합해 예술가 서점을 만들었소.

현재 ‘책만들기실험실’을 운영하는 이승희 프로그래머는 책 만드는 장인(匠人)이오. 스승인 김진섭 책공방북아트센터 대표와 함께 『활판공방탐사』 『책공방탐사』 등의 책을 펴낸 책문화 기획자이기도 하오.

이명규 프로그래머는 전북에서 유일하게 독립출판물만을 소개·판매하는 책방 ‘에이커북스토어’ 대표요.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를 쓴 창작자이자 전주 1세대 독립출판인이오.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가 열리는 연화정도서관이 있는 전주 덕진공원 옛 모습.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가 열리는 연화정도서관이 있는 전주 덕진공원 옛 모습. [사진 전주시]

“『책쾌 송신용』에서 영감 얻어” 

임 기획자는 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쓴 『책쾌 송신용』에서 ‘전주책쾌’ 영감을 얻었다고 하오. 이 교수는 책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독서’가 전공이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조선시대는 책이 돌지 못한 ‘동맥 경화’에 걸렸다”며 “‘민간요법’으로 책을 유통한 책쾌가 없었다면 책이 돌지 못했고, 지식이 퍼지지 못했다”고 말했소.

임 기획자는 “전주가 가진 출판 문화 역사와 전통을 ‘책쾌’의 입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하오. “이번 박람회를 계기로 전주에 ‘독립출판’ 생태계를 만들고, 관광 도시로서 전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게 목표”라고 하더이다. 선배 ‘책쾌’로서 그의 꿈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라오.

※본 기사는 ‘2023 전주책쾌’ 관련 자료와 취재 내용을 토대로 무명의 ‘책쾌’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에 참여하는 '현대판 책쾌' 명단. 전국에서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독립출판인과 소규모 출판사, 독립서점 등 67개 팀이 모일 예정이다. [사진 전주시]

'2023 전주책쾌: 독립출판 북페어'에 참여하는 '현대판 책쾌' 명단. 전국에서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독립출판인과 소규모 출판사, 독립서점 등 67개 팀이 모일 예정이다. [사진 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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