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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역행하는 4할 타자 루이스 아라에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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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말린스 루이스 아라에즈. AP=연합뉴스

마이애미 말린스 루이스 아라에즈. AP=연합뉴스

사라진 '4할 타자'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마이애미 말린스 왼손타자 루이스 아라에즈(26·베네수엘라)가 미친듯이 안타를 때려내고 있다.

아라에즈는 지난 3일(한국시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5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 데뷔 후 첫 5안타를 친 아라에즈는 이후 4경기에서도 8안타를 몰아쳤다. 8일 현재 시즌 타율은 정확하게 4할(215타수 86안타)이다. 당연히 메이저리그(MLB) 전체 타율 1위다.

특히 최근 15경기에선 무려 타율 0.448을 기록하는 상승세다. 아직 팀이 정규시즌 일정의 37%(60경기) 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4할 타율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MLB닷컴은 아라에즈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매일 소개하고 있다.

스킵 슈마커 마이애미 감독은 "지금 아라에즈처럼 치는 타자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미쳤다. 솔직히 비교할 수 있는 타자가 없다. 그런 타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며 극찬했다. 2019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빅리그에 데뷔한 아라에즈는 4년 차인 지난해 아메리칸리그 타격왕(0.316)을 차지했고, 이제는 '꿈의 영역'과 싸우고 있다.

지난해 실버슬러거 아메리칸리그 유틸리티 플레이어 부문 최초 수상자가 된 아라에즈(오른쪽 둘째). AP=연합뉴스

지난해 실버슬러거 아메리칸리그 유틸리티 플레이어 부문 최초 수상자가 된 아라에즈(오른쪽 둘째). AP=연합뉴스

'4할 타자'는 멸종된 동물 같다. 메이저리그(MLB)에선 1941년 테드 윌리엄스(0.406)가 마지막으로 4할을 넘겼다. 이후엔 노조 파업으로 8월에 시즌이 조기종료된 1994년 토니 그윈이 기록한 0.394가 가장 가까운 기록이었다. 21세기 최고 기록은 2004년 스즈키 이치로가 기록한 0.372다. 2009년엔 조 마우어가 71경기까지 타율 0.415를 기록했지만, 결국 0.365로 시즌을 마쳤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를 통계학·수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가 발전하면서 타율의 가치는 예전보다 낮게 평가되고, 장타율의 가치가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배트에 갖다 맞히기보다는 삼진을 당하더라도 '어퍼 스윙'을 하거나, 힘껏 휘두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2000년 0.270이었던 MLB 평균 타율은 계속 떨어져 지난해엔 0.243까지 내려갔다.

베네수엘라 국가대표로 2023 WBC에 출전한 아라에즈. USA투데이=연합뉴스

베네수엘라 국가대표로 2023 WBC에 출전한 아라에즈. USA투데이=연합뉴스

아라에즈는 이런 흐름에 역행했다. 키 1m78㎝, 체중 79kg로 메이저리거 평균 체격보다 작은 그는 정확도를 택했다. 낮은 쪽을 겨냥하고, 그라운드 안으로 타구를 날리는 데 집중했다. 타격 준비 동작 때 손을 높게 들지 않고, 테이크백(방망이를 뒤로 당겨서 힘을 모으는 동작)도 거의 없다.

그래서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MLB 최하위권이다. 올해 친 87개의 안타 중 홈런은 1개다. 3루타도 1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4월 12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 기록한 게 유일하다.

대신 헛스윙을 여간해서 하지 않는다. 올해 아라에즈의 삼진율은 4.6%로 MLB 최저다.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온 공을 휘둘렀을 땐 94.6%의 확률로 방망이에 맞췄다. 상대 투수 유형(우투수 타율 0.410, 좌투수 타율 0.382), 홈(0.413)과 원정(0.389)도 가리지 않는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배트를 공에 갖다대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라운드 가운데 쪽으로 보내 안타 확률을 높인다.

4할 타율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아라에즈. AP=연합뉴스

4할 타율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아라에즈. AP=연합뉴스

메이저리그 좌타자들은 수비 시프트와도 싸운다. 하지만 아라에즈는 아니다. 낮은 공과 바깥쪽 공을 결대로 밀어 3루 방향으로 날리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타구 분포도를 보면 그라운드 전체에 고르게 뿌려져 있다. 장타 비율이 높지 않다 보니 상대 팀도 굳이 수비 위치를 옮기지 않는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아라에즈는 '퓨어 히터(pure hitter·맞히는 능력이 뛰어난 타자)'다. 맞히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과거엔 웨이드 보그스, 토니 그윈 등이 있었으나 이치로 이후 이런 타자 계보가 끊어졌다. 지난해 타격왕에 오르면서 '눈을 떴다'는 느낌이다. 자기가 잘하는 것에 집중하니 더 좋아졌다"고 평했다.

MLB엔 '홈런왕은 캐딜락을 타고, 타격왕은 포드를 탄다'는 격언이 있다. 교타자는 부와 명성을 얻기 힘들다는 의미다. 하지만 '똑딱이 타자'도 최고 경지에 이르면 스타가 될 수 있다. 올해 마이애미로 팀을 옮긴 아라에즈는 연봉조정에서 승리해 610만달러(약 80억원)에 계약했다. '4할 타율'까지 달성한다면 리그 MVP도 충분히 노릴 수 있다.

송 위원은 "아직 이른 시점이지만 지금 4할을 치는 것도 대단하다. 4할을 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시점 가장 정교한 타자"라며 "MVP 투표에선 이런 선수들이 손해를 보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MVP는 투표라 분위기가 중요하다. 최근 MLB는 규칙 개정을 통해 홈런만 노리는 야구 대신 다양한 야구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라에즈를 더욱 띄우려 한다는 느낌이다. 마이애미 팀 성적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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