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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GO] 역사의 아픔과 교훈을 되새겨보는 여행 ‘다크 투어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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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다닌다고요? 일기쓰기 숙제하는데 ‘마트에 다녀왔다’만 쓴다고요? 무한고민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을 위해 ‘소년중앙’이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 아이랑 뭘할까, 고민은 ‘아이랑GO’에 맡겨주세요. 이번엔 역사 속 현장을 둘러보며 다크투어를 떠나야하는 이유를 살펴보세요.

역사를 바로 알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크 투어를 떠난 소중 학생기자단이 6·10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을 찾아 과거 사진과 비교하며 34년 전 그날을 떠올려봤다.

역사를 바로 알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크 투어를 떠난 소중 학생기자단이 6·10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을 찾아 과거 사진과 비교하며 34년 전 그날을 떠올려봤다.

여행 하면 경치 좋은 곳에서 쉬거나 체험을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최근엔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가족과 함께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다크 투어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을 찾아갔다.

다크 투어를 떠나야 하는 이유

예전에는 부끄럽고 아픈 역사는 기억에서 지워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엔 되짚어보고 반성하자는 의미로 그런 장소를 널리 알리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한 공간에서 일어난 슬픔은 그곳에 가야만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슬픔은 공유되고 외부에까지 전파된다”고 서술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란 말이 적혀있다. 아픈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크 투어리즘이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픔의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알게 되고, 반성하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크 투어리즘이 상업화되는 것을 비난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장에 담긴 의미가 변질될 경우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86년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은 일부 출입이 허가된 이후 상업적인 목적만을 가진 관광업체들의 자극적인 투어가 성행하면서 사회문화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논쟁이 불거진 적도 있다. 관광객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여행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는 사례도 늘어났다. 일부 관광객이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서 속옷 차림 등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고, 독일 나치가 ‘죽음의 수용소’로 이용했던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경례 포즈를 취한 사진이 SNS에 올라와 물의를 빚었다. 비극이 일어난 장소를 여행할 땐 다른 관광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로 가는 고된 여정: 6월 민주항쟁 다크 투어

소중 학생기자단은 최서향 근현대 역사 탐방 해설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장소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최 해설사가 “남산에 도대체 어떤 역사의 흔적이 있어 여기서 시작하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말문을 열었다. 각 스팟과 함께 최 해설사의 설명을 그대로 담았으니 투어할 때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남산골한옥마을    
-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가길 28

최서향 근현대 역사탐방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최서향 근현대 역사탐방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케이블카와 서울타워가 있는 관광명소 남산이 가슴 아픈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은 아마 잘 몰랐을 거예요. 이곳에는 일제의 군사 주둔지가 있었어요. 러‧일 전쟁을 일으키며 일제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라는 조약을 강제로 맺었어요. 간단히 말하면 조선의 땅을 일본이 필요하면 아무 곳이나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한옥마을 있는 곳에 군대가 머물렀는데 그 이름이 한국주차군사령부예요. 나중에 용산으로 옮겨간 후에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자리를 잡아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을 한다든지 공포정치를 담당했던 그 헌병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한 거죠.

해방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를 일으키고 이곳에 수도방위사령부를 만들어요. 수도 서울을 보호하기 위한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군부대로부터 역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죠. 일제에서 대한민국으로 주체는 바뀌었지만 군사시설이라는 면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의 다크 투어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박정희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신군부 전두환 시대의 남산을 이야기할 거예요. ‘치욕의 남산’에서 ‘공포의 남산’으로 변모하는 그 현장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 소릿길 터널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82

소릿길 터널에 들어서면 철문 소리, 타자기 소리, 물소리가 들리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낸다.

소릿길 터널에 들어서면 철문 소리, 타자기 소리, 물소리가 들리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낸다.

남산에서도 악명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84m의 터널을 지납니다. 터널에 들어서면 철문 소리, 타자기 소리, 물소리가 들리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내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이 침해된 공간임을 알려줘요.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끌려오면 굉장히 공포감을 느꼈겠죠.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통로 끝에 커다란 이중철문이 있어 자동차가 서면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대요. 그럼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기 위해 터널을 지나갈게요.

▶ 서울특별시청 남산 1별관(중정정보부 제5별관 터) 
-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 231

주로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던 중앙정보부 제5별관 대공수사국 자리에서 당시 얘기를 듣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주로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던 중앙정보부 제5별관 대공수사국 자리에서 당시 얘기를 듣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서울특별시 중부공원 녹지사업소라고 적혀 있죠. 이곳엔 중앙정보부가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시 기관들이 사용합니다.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한 달 후 중앙정보부법을 통해 중앙정보부를 설치해요. 당시 남산에 갔다는 것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것을 의미했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권력 내부 감시 대상자, 조작간첩 대상자들을 불법으로 납치하고 고문했습니다. 1981년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이 바뀌는데 하는 일은 같았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때 국가정보원으로 변경되죠.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건물 소유권이 서울시로 넘겨졌고,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중앙정보부 시절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어요.

남산 1별관 건물 뒤편 계단. 중앙정보부가 있던 당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대공수사국 조사실이 있었다.

남산 1별관 건물 뒤편 계단. 중앙정보부가 있던 당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대공수사국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 여기는 가장 악명 높은 공간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제5별관 대공수사국. 주로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던 곳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는 100일이 넘는 고문 끝에 강제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간첩으로 낙인 찍혔죠. 이곳에 끌려왔던 사람들은 철문을 통과해 건물 뒤편까지 차로 이동했어요. 지하 2층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문 안에 조사실이 있었죠. 길이가 50m쯤 되는 긴 복도와 방들이 있는데, 4평 정도의 방 안에는 책상‧욕조‧세면대‧야전침대 같은 게 놓여있었대요. 이제 소릿길 터널을 되돌아나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체력 단련하는 실내체육관으로 사용했던 남산체육센터를 지나 본관 건물로 가볼게요.

▶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종합방재센터(본관‧제6별관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6

과거 중앙정보부 본관 건물로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과거 중앙정보부 본관 건물로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현재 서울유스호스텔인 이 건물은 과거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죠.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를 아시나요. 남산의 부장은 중앙정보부장을 말하는데,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 청와대를 마주 보는 남산 중턱의 집무실에서 근무해 생긴 호칭이죠. 박정희 정권은 정권 반대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사회질서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해 돌파하려고 했는데 중앙정보부가 이를 주도했습니다.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에는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있다.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에는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있다.

통신을 담당하던 안기부 제1별관 건물은 내곡동으로 이전 후에 폭파·해체됐다.

통신을 담당하던 안기부 제1별관 건물은 내곡동으로 이전 후에 폭파·해체됐다.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에는 서울종합방재센터가 들어섰어요. 당시 지하 3층까지 있지만 지상에는 아무 구조물이 없어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만들었죠. 지하에는 취조실이 있었는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죠. 저기 언덕 위에는 원래 제1별관 건물이 있었어요. 스파이 하면 도청‧감청이 떠오르죠. 제1별관이 통신을 담당했는데 내곡동으로 이전하고 폭파‧해체해버려 공터가 됐죠. 왜 안기부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는 거겠죠.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

 ▶ 통감관저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6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남산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들도 많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조금 벗어나지만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잠깐 짚어갈게요. 이곳은 1906년 이래 일본의 통감관저가 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내용의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한 경술국치의 현장이죠. 1910년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한 2010년 이 터에 표석을 세웠어요.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쓰셨어요. 치욕의 장소이지만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곳이죠.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그 울림이 팔도에서 돌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그 울림이 팔도에서 돌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옆의 공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피해 할머니들을 기억하자며 2016년 8월 29일에 조성한 테마공원입니다. 세상의 배꼽이라고 되어 있는데 중앙에 할머니들이 외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한글‧일본어‧영어‧중국어로 새겨져 있으며, 그 울림이 팔도에서 모은 돌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앉으면 흔들리는 게 느껴지죠. 작은 파동이 점점 크게 세상으로 번져 나가도록 흔들어보세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지워지는 게 아니잖아요. 다크 투어에는 이런 것을 없애지 말고 기억하며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 예장공원‧기억 6(중앙정보부 6국 터) 
- 서울시 중구 소파로 148-10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곳에는 당시 잔해들을 모아둔 마당과 빨간 대형 우체통 모양의 전시실 ‘기억6’이 생겼다.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곳에는 당시 잔해들을 모아둔 마당과 빨간 대형 우체통 모양의 전시실 ‘기억6’이 생겼다.

남산에서의 마지막 코스는 예장공원인데요. 학원사찰‧수사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곳입니다. 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대학생들이 끌려왔는데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은 인권 유린 사건 가운데 하나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난 곳이죠. 2017년 서울시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기억6’으로 명명하고 빨간 대형 우체통 모양 전시실을 만들었죠.

‘기억 6’ 전시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기억 6’ 전시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어요. 당시 수사와 고문이 이뤄진 6국 지하 취조실도 재현했죠. 옛 건물에서 나온 벽돌과 부서진 조각, 녹슨 철근과 기둥 잔해 따위가 모여서 마당이 되고 6개 의자가 되었습니다. 빨간 의자에 앉아 역사에 말을 걸어보세요. 역사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걸지 않을 때 역사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면 우리의 사회는 어떤 세상이 될지 생각해 보세요.

전시실에 들어가면 당시 수사와 고문이 이뤄진 6국 지하 취조실도 재현돼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당시 수사와 고문이 이뤄진 6국 지하 취조실도 재현돼 있다.

▶ 명동성당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경찰은 처음엔 사건을 속이려고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지만, 결국 진실이 드러났죠. 이 사건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운동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해 4월 13일 독재 정권은 재집권을 위해 호헌(헌법을 지킨다) 조치를 발표했는데, 당시 헌법에는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로 되어 있었어요. 국민들은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길 바랐는데 전두환 정권이 무시한 거죠.

역사를 바로 알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크 투어를 떠난 윤시현·김재신·송현근 학생기자(왼쪽부터). 6·10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을 찾아 과거 사진과 비교하며 34년 전 그날을 떠올려봤다.

역사를 바로 알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크 투어를 떠난 윤시현·김재신·송현근 학생기자(왼쪽부터). 6·10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을 찾아 과거 사진과 비교하며 34년 전 그날을 떠올려봤다.

이에 맞서 국민들은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6월 9일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는 사건도 일어나며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함께했어요.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까지 항쟁은 약 20일간 이어졌습니다. 연인원 500여만 명이 참가했고, 절정이던 6월 26일 ‘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개 도시 130여만 명이 거리에 나섰어요.

6월 민주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요.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습니다. 6월 10일, 범국민 규탄대회가 열리며 명동 주변에서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는데요. 경찰에 밀리던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왔어요. 15일까지 명동성당에서 농성이 진행되고 이러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명동성당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죠.

▶ 향린교회  
- 서울시 중구 명동 13길 27-5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6월 3일 향린교회 출입문 기둥에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설치됐다.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6월 3일 향린교회 출입문 기둥에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설치됐다.

6월 민주항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한 곳이에요. 당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기로 하고 결성식을 열어야 하는데, 명동성당‧성공회성당 등 할 만한 장소에는 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죠. 딱 한 곳 경찰들이 안 지킨 향린교회서 1987년 5월 27일 재야인사 150여 명은 무사히 결성식을 마쳐요. ‘향린교회’라고 쓴 쪽지를 전달해서 장소를 안내했다고 해요. 이날을 기념해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6월 3일 향린교회 출입문 기둥에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설치됐습니다.

▶ 서울광장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10
서울광장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시민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적인 장소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하며 미국의 워싱턴DC를 벤치마킹해 대한문 앞에 도로와 광장, 환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광장은 고종 보호 시위,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주요 무대가 됐어요.

1987년 6월 성공회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를 시작으로 도심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다.

1987년 6월 성공회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를 시작으로 도심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다.

▶ 성공회성당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21길 15
1987년 6월 10일 이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어요. 오후 6시, 성공회성당에서 42번 종이 울렸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세월이 42년이나 되었으며, 이제 그러한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죠. 종소리와 함께 도로를 메운 차들은 경적을 울렸죠. 6월 항쟁의 시작이었어요. 도심 곳곳에서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단위의 학생과 시민이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죠.

이날을 기념하여 6‧10 민주항쟁 10주년이었던 1997년 6월 10일 성공회대성당 뒤편 화단에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지석이 설치되었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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