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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정복' 가능성 연 하버드대 교수 "영감 준 사람은 엄마 김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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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부모님은 과학자도 아니었고, 어머니는 심지어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어요. 그래도 제가 항상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주셨고, 한국인이란 자부심을 심어 주셨습니다.”

마샤 헤이기스 삼성호암상 수상자 인터뷰 #하버드 의대 교수로 암세포 증식 최초 규명 #미 공군 출신 아버지 둔 한국계 미국인

지난 1일 ‘제33회 삼성호암상’ 의학상을 받은 마샤 헤이기스(49)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의 말이다. 헤이기스 교수는 ‘세포 내 암모니아와 같은 노폐물이 암세포를 만들고 성장시킨다’는 암세포의 증식을 세계 최초로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삼성호암상을 받았다. 삼성호암상은 과학·공학·의학·예술·사회공헌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여, 글로벌 리더로 인정받는 국내·외 한국계 인사를 발굴해 시상하고 있다.

마샤 헤이기스 교수,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  

헤이기스 교수는 어머니가 한국인인 한국계 미국인이다. 미 공군인 아버지가 한국에서 복무할 때 어머니를 만났고, 다섯 살까지 경기 의정부에 있는 외가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연구자로 성장하기까지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을 “어머니 ‘김·순·자’”라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또 “동료 과학자이자 남편인 케빈 헤이기스 하버드대 의대 교수와 각각 20살·14살·9살인 세 아들도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았어요. 그때 팀워크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죠. 오늘날의 과학은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의 팀워크가 중요한데, 큰 자산이 됐습니다. 미국에 간 뒤엔 외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제 방을 같이 썼어요. 그래서 가족에 대한 기억은 아주 소중하고 애틋하죠. 열 살까진 한국어를 꽤 잘했는데, 오랜 기간 안 쓰다 보니 한국어 듣기는 되는데 이제는 말하기가 안되네요(웃음).”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삼성호암상 수상자들이 1일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2023 삼성호암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임지순 포스텍 석학교수, 과학상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 위스콘신대 교수, 공학상 선양국 한양대 석좌교수, 의학상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 예술상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조성진 피아니스트 대리 수상), 사회봉사상 사단법인 글로벌케어 추성이 공동대표, 박용준 회장. 사진 호암재단

삼성호암상 수상자들이 1일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2023 삼성호암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임지순 포스텍 석학교수, 과학상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 위스콘신대 교수, 공학상 선양국 한양대 석좌교수, 의학상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 예술상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조성진 피아니스트 대리 수상), 사회봉사상 사단법인 글로벌케어 추성이 공동대표, 박용준 회장. 사진 호암재단

“의사 되겠다” 꿈가진 소녀 이끈 미지의 세계 

헤이기스 교수가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는 “과학자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며 “지금도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울 만큼 어릴 때 동물을 좋아했는데, 10대 땐 방학 때마다 동물병원에서 아픈 동물을 돌봤다”고 말했다. 이어 “수학·생물학 과목을 좋아했는데 ‘의사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꿈만 가진 소녀였다”고 덧붙였다.

“대학 시절엔 의사가 되기 위한 경험을 쌓으려 응급구조사 일을 했어요. 3교대로 구급차를 타고 환자를 이송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새벽 6시 퇴근길, 포스터 한장을 보게 됐어요. ‘눈이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가’에 대한 연구 내용이었죠. 근데 그 시간에 문 열린 연구실이 딱 하나 있는 거예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문을 두드렸어요. ‘교수님 이 연구가 뭔가요’ 이 한 마디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포스터를 게시했던) 릭 코트 교수는 2시간여 동안 연구에 관해 설명했고, 연구실에 들어오라고 제안하셨어요.”

그렇게 ‘미지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다. 학부를 마친 뒤 더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의대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 헤이기스 교수는 “대학원 시절 현미경으로 암세포를 연구했는데, 그때 미토콘드리아(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 소기관)를 만나게 됐다”며 “미토콘드리아의 역동적인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고 말했다.

미토콘드리아 연구 ‘암 정복’ 새 가능성 열어

그 이후론 미토콘드리아에 대한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기 시작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데, 동시에 암세포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는 걸 찾아냈다. 또 암모니아 같은 노폐물도 만들어내는데, 암세포는 이 노폐물을 활용해 더 많은 아미노산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다는 걸 밝혀냈다. 이런 성과는 암 치료 새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됐다.

헤이기스 교수는 “T세포 같은 면역세포가 암과 맞서 싸운다”며 “미토콘드리아는 암세포뿐 아니라 암과 맞서 싸우는 면역세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 변형으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면역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암세포가 암모니아를 재활용하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가 수월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암모니아 측정 방법이 마땅치 않아 가로막혔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며 “답을 찾은 건 고전 문헌 속 이론이었는데, 옛 방식을 응용해 창의적인 방식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런 창의적인 방식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 수상자인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누구나 과학자 꿈꾸길…평등성 높이는 것 목표”

한국의 ‘의대 선호 현상’에 대해서 헤이기스 교수는 “부모들에게 ‘자녀가 과학자가 돼도 괜찮다, 걱정하지 마시라’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그는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하버드대 의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의사를 꿈꿔왔던 소녀가 지금은 ‘내일의 의사’들을 키워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과학 연구는 새로운 퍼즐을 풀 기회다. 최초로 무엇인가를 개척하는 선구자 역할인 셈”이라며 “각자 자신의 꿈을 이루는 건 중요하고, 적성에 따라 꿈을 이룰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헤이기스 교수의 꿈은 ‘영원한 과학자’로 남는 것이다. “기초 연구는 오랜 여정이에요. 그 여정에 새로운 과학자를 키워내는 게 제 역할 중 하나죠. 제가 과학자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젊은 학생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특권이 있어서예요. 어려운 점? 물론 많아요. 근데 그 어려움이 곧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론 여성·소수자 등이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누구나 과학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과학계의 평등성을 높이는 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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