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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50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중앙일보

입력

1일 서울 광화문에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1973년 5월 30일부터6월 3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총 334만 청중을 대상으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통역을 맡은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가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는 3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다.

1일 서울 광화문에서 빌리 그레이엄 50주년 기념대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족부터 윌 그레이엄 목사, 김하나(명성교회) 목사,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오정현(사랑의교회) 목사,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사진 극동방송

1일 서울 광화문에서 빌리 그레이엄 50주년 기념대회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족부터 윌 그레이엄 목사, 김하나(명성교회) 목사,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오정현(사랑의교회) 목사,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사진 극동방송

이날 기자회견에는 2018년 소천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대신해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참석했다. 그는 50주년 기념대회에서 주강사를 맡아 대표설교를 한다. 이번 기념대회에는 전국 교회에서 약 10만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50년 전에 저희 아버지는 55세였다. 저는 지금 71세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은 크게 변했다. 세계도 변했다. 그런데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그런 인류애적인 사랑의 마음”이라며 “인간의 마음은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다. 세속주의ㆍ공산주의ㆍ물질주의와 섹스나 마약도 그걸 충족시킬 수가 없다. 인간이 찾는 영원함의 공간을 채울 수가 없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채워진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북한 선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아버지는 북한을 두 번 방문했다. 저는 네 번 방문했다. 북한에서 구호활동도 했다. 치과 치료도 하고, 지방의 병원에 전기도 공급하고 음식도 나누었다. 북한의 기독교인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의 어려운 삶을 알고 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지난 2년간 북한을 향해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북한의 문이 열리길 바란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할 준비가 돼 있다.”

1973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오른쪽)의 설교를 김장환 목사가 통역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3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오른쪽)의 설교를 김장환 목사가 통역하고 있다. 중앙포토

50주년 기념대회 대표대회장을 맡은 오정현(사랑의교회) 목사는 “1907년에 평양 부흥이 있었다. 그게 일제 36년의 엄혹한 시기를 지나는 힘이 됐다. 1973년에 있었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제2의 부흥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계기가 됐다”며 이번 대회의 의미를 짚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손자인 윌 그레이엄 목사도 참석했다. 그는 “서양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손주는 없고 자녀만 있다고 말한다. 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믿음이 좋다고 제가 천국에 가는 건 아니다. 저도 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며 “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코가 크다. 저희 집안의 특징이다. 제 목소리도 할아버지를 닮았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매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오른똑)와 김장환 목사가 전도대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오른똑)와 김장환 목사가 전도대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중앙포토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50년 전 전도대회의 주인공이었던 김장환 목사는 “그때 저는 39살이었다. 지금은 89살이다. 50년이 흘렀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이런 대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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