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사업 실패와 방만 운영 때문에 존폐 기로에 놓인 세종연구소(세종연)가 심각한 재정난을 해소하려고 추진하는 부동산 임대 사업이 논란에 휩싸였다. 임대 기간이 특혜로 보일 정도인 최장 90년으로 설정되면서다. 또 문정인 전 세종재단법인 이사장이 사임하기 직전 해당 계약을 체결한 것 역시 의문이 제기되는 요소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문 전 이사장은 지난 3월 14일 아울렛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A사와 부동산 임대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경기 성남시의 연구소 부지 3만 8000㎡(약 1만1500평)를 장기 임대해 대형 복합건물을 짓는 내용이다.
그런데 계약 체결 시점은 법인 이사회에서 문 전 이사장에 대한 사임 안건이 의결된 날이다. 문 전 이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 세종연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 계약에 서명한 셈이다.
"외교부 승인 후 계약" 닷새 만에 깨진 합의
특히 문 전 이사장은 계약 닷새 전인 3월 9일 A사와 “주무관청(외교부)의 사업승인 완료시 공식적으로 계약을 체결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세종연은 외교부 등록 국가정책연구재단으로 임대 사업 등 재산상 중대 변동이 발생할 경우 주무관청인 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문 전 이사장은 외교부의 승인 절차 없이 계약을 체결한 뒤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문 전 이사장이 체결한 계약은 사업비 규모만 6000억원이다. 부지 정중앙의 연구소 본관을 허물고 A사는 이 자리에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대형 복합건물을 짓는다. 연구소 본관을 철거하는 대신 A사는 복합건물이 들어설 자리 옆에 새로운 본관 건물을 신축해 세종연에 기부한다.
이례적인 '최장 90년' 임대 계약
세종연은 해당 부지의 임대 기간을 50년으로 설정했다. A사가 원할 경우 20년씩 두 차례에 걸쳐 연장할 수 있다. 최장 90년의 임차 기간을 보장하는 계약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외교 소식통은 “세종연이 사실상 1만 1500평 부지에 대한 소유권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유사하다”며 “통상 20년, 길어도 30년을 넘지 않는 게 계약 관례인데, 이 같은 초장기 임대 계약을 맺게 된 배경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연의 임대 사업 대상자로 A사가 선정된 과정도 석연치 않다. 세종연은 지난해 ‘스토킹 호스(Stalking-horse)’ 방식을 거쳐 A사를 사업자로 최종 선정했다. 스토킹 호스는 우선협상대상자와 사전 계약을 맺은 뒤 추가적인 공개 입찰을 거쳐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업대상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스타항공·쌍용차 등 회생신청을 한 기업 매각에 주로 활용됐다.
세종연은 기존에 사업 논의를 지속해 오던 A사에 우선협상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수의 계약으로 인한 배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스토킹 호스를 선택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공개 입찰을 통해 다른 업체가 A사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했을 가능성 자체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점에서 특혜 논란이 일 수 있다.
사업 시작과 동시에 불어나는 '채무'
세종연은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매년 112억원의 임대 수익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세종연 안팎에선 현재의 재정 상태 등을 감안했을 때 사업을 감당할 여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 세종연은 임대 사업 과정에서 1만1500평 규모의 부지만 제공할 뿐 6000억원에 달하는 사업비는 전액 A사가 부담하는 구조다. 통상 땅 소유주가 건물을 지은 뒤 이를 임대하는 것과 달리 세종연의 임대 사업에선 A사가 4000억원을 들여 임대용 복합건물을 짓는다. 용도변경을 위한 기부채납용 임대주택 건설 비용 400억원 역시 A사가 대신 지급하는데, 이 돈은 모두 세종연의 빚이 된다. 이에 따라 세종연은 임대 기간인 50년 동안 매년 27억원을 A사에 지급해야 한다.
본관 철거비용 50억원도 마찬가지로 A사가 지급한 뒤 5년간 세종연이 나눠 갚는다. 임대 부지에 대한 세금 역시 땅 소유주인 세종연이 부담한다. 이외에도 세종연은 당장의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A사로부터 매년 30억원을 빌린 뒤 임대 수익이 발생하면 이를 갚을 예정이다.
세종연이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탓에 A사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계약 조건이 설정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효력 없는 상징적 서명일 뿐"
논란에 대해 세종연 측은 외교부의 승인 전에는 해당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 전 이사장이 마지막 날 계약을 체결한 것은 ‘알박기’가 아닌 A사와의 신뢰를 강화하고 사업 추진 의지를 재확인하기 위한 상징적 절차일 뿐이란 주장이다.
세종연 관계자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하루가 급한 상황에서 언제 부임할지 모르는 신임 이사장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사장 대행(이상현 세종연구소장)이 계약서에 서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며 “이사회에서도 외교부의 승인 없이는 어차피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만큼 최대한 신속한 행정처리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고 말했다.
임대 기간이 과도하게 길게 설정됐다는 지적에 대해선 “기간을 20년 혹은 30년으로 짧게 설정할 경우 매년 임대 수익의 대부분이 채무 비용과 세금 등으로 소모돼 재정난을 타개하기 어렵단 판단으로 불가피하게 50년 장기 임대를 하게 됐다”며 “입찰 방식으로 스토킹 호스를 선택한 것 역시 법무법인 자문 등을 통해 배임 등의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받은 상태”라고 해명했다.
지난 17일 세종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선임된 이용준 전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취임 직후 해당 부동산 임대 사업 계획의 타당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부 역시 세종연으로부터 공식적인 사업 승인 요청이 접수될 경우 그간의 논의 과정을 점검하고 법률 검토를 진행할 예정이다. 임대 사업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임대 사업을 대신할 새로운 자구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세종연은 해산 수순에 들어서게 된다. 세종연의 재정 상황을 감안할 때 현재 구조로는 채 2년도 버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