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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에도 젊음 있었다, 요즘 청춘에 생소하지 않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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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최근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 권여선 소설가. 그는 “각각의 계절에 맞는 힘을 길어내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했다. [사진 정멜멜]

최근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 권여선 소설가. 그는 “각각의 계절에 맞는 힘을 길어내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했다. [사진 정멜멜]

촘촘한 심리 묘사와 실감 나는 캐릭터 설정으로 ‘인물 장인’이라 불리는 소설가 권여선(58)이 3년 만에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문학동네)을 펴냈다.

알코올 중독자로, 혈혈단신의 빈곤층 중년으로, 어렵게 인생을 견디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2016년), 레즈비언 할머니가 나오는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2020년)을 잇는 그의 일곱 번째 소설집이다.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등 2018년 하반기부터 지난해 말까지 각종 지면에 발표한 단편 7편을 묶었다. 새 소설로 돌아온 권여선을 지난 22일 서면 인터뷰했다.

각각의 계절

각각의 계절

권여선은 1983년에 대학에 들어가 ‘87년 체제’를 온몸으로 체험한 86세대다. 그의 청춘의 기억은 다분히 ‘운동’과 관련돼 있다. 일곱 편의 단편 중 가장 최신작인 ‘사슴벌레식 문답’(2022)은 뜨거운 1980년대를 살아냈던 네 명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넷의 우정은 연극을 하겠다며 교사를 때려치운 정원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운동권 동지였던 경애와 부영의 사이가 모종의 배반으로 파국에 치달으며 처참하게 끝난다.

단편 제목 ‘사슴벌레식 문답’은 정원과 ‘나’의 대화에서 따왔다.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 4인방은 강촌으로 우정 여행을 떠나고, 숙소에서 “휴지로 감싸기 두려울 만큼 크고 우람한” 사슴벌레를 발견한다.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냐”고 묻는 나에게 숙소 주인은 득도한 표정으로 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도돌이표처럼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는 이 무용(無用)한 대화는 정원과 나의 속마음으로 확장된다. 정원은 연극이 하고 싶고, 나는 소설이 쓰고 싶다. 불확실한 미래라도 일단은 뛰어들겠다는 청춘들은 사슴벌레식 문답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한다. 왜 하고많은 일 중에 하필 소설이고 연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쓰고 싶고, 연극이 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들이 가진 전부라서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더는 직설적일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열망을 표현한다.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라고.

권여선은 나와 정원이 사슴벌레식 문답을 이어가며 대화하는 장면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꼽았다. “서로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슬그머니 물어보는 모습이 들끓는 청춘의 갈피 속에 불현듯 펼쳐진 고요하고 진실된 장면처럼 생각됐다”는 게 그 이유다.

그의 소설을 ‘운동권 후일담’이라고 규정하는 일부 평에 대해서는 “내가 겪은 일들이나 겪었을 법한 일을 쓰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운동권에 몸담았던 친구들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그 풍경이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 생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들의 관계가 비틀리는 과정 또한 “특별히 낯설거나 어려운 독법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부연했다. “운동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세대의 경험과 슬픔을 쓰는 것”이라면서다.

일곱 단편 속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에 사로잡혀있거나 불면에 시달린다. ‘사슴벌레식 문답’의 나는 우정의 파국을 괴로워하며 청춘의 기억을 되새김질한다. 단편 ‘무구’의 주인공 소미는 환갑을 앞둔 나이에 대학 동기 현수와 재회하지만 현수의 추천으로 산 땅에 묘역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와 멀어진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의 오익은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여동생인 오숙의 과거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어떤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으며 때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권여선은 “책을 읽고 자신의 과거가 궁금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문득문득 과거를 떠올리고 기억 속에서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책 제목 ‘각각의 계절’은 단편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서 따왔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 권여선은 독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살면서 보니,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다음 시절을 나려면 그 전에 키웠던 힘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애거나 다른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 독자 여러분도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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