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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중 전화도 스토킹" 판결 늘었다…국어사전 꺼낸 판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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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반복적인 ‘부재중 전화’를 스토킹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법원 판단이 달라지고 있다.

2021년 10월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부재중 전화는 스토킹 행위가 아니다’고 판단하는 재판부가 많았다. 스토킹 범죄 피고인들(과 그의 변호인들)은 이런 판례를 적극 차용해 변론에 활용해 왔다. ‘안 받으면 무죄, 받아야 유죄’ 논란이 일어난 배경이다.

하지만 최근 반복적인 전화를 피해자가 받지 않아도 스토킹 범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부재중 전화도 스토킹 범죄에 포함하며 그 이유를 판결문에 설명한 재판부는 지난해 9~12월 5곳에서 올해 들어 지난달 15일까지 9곳으로 늘었다. 춘천지법·수원지법·대구지법의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부재중 전화 부분을 무죄로 판단한 건을 뒤집기도 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부재중 전화를 스토킹 범죄에서 배제한 판단은 대부분 18년 전 대법원판례에 근거를 둔다. 대법원은 2005년 2월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 때 상대방 전화기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송신된 음향이 아니므로 정보통신망법 위반이 아니다”고 판단했다(당시엔 스토킹처벌법이 없어 전화 스토킹에 대해 정보통신망법 위반을 적용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인천지방법원에서 단독 판사가 판결문에  ‘부재중 전화도 스토킹 행위로 인정한다’는 각주를 달고, 서울고등법원에서 “벨소리, 부재중 전화 표시도 스토킹 행위”라 판단한 뒤 전국에서 비슷한 결론에 이른 재판부가 많아졌다. 이들은 18년 전 대법원의 정보통신망법 판결에서와 다른 스토킹처벌법의 판단 근거를 내세운다.

스토킹 범죄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

스토킹 범죄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

① ‘통하여’와‘이용하여’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 박연욱)는 표준국어대사전을 펼쳤다. 정보통신망법엔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부호·문언·음향을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돼 있다. 새로 제정된 스토킹처벌법은 ‘전화 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음향·글·말·부호 등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를 범죄로 본다. 재판부는 “‘통하다’는 어떤 곳에 무엇이 지나간다는 뜻이고, ‘이용하다’는 필요에 따라 쓴다는 뜻”으로 양자가 다르며 “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반드시 그 전화와 연결된 정보통신망에 음향이 지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봤다.

② 무음이면 어떡하나 VS 인식하면 공포

춘천지법 박진영 판사는 부재중 전화는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당시) 피해자의 휴대전화기 통화 수신음 모드가 무음으로 설정돼 실제로 벨소리가 울렸는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지난 2월 1일 선고). 검사가 ‘음향 등을 도달하게 했다’고 기소했다면 휴대전화의 벨소리, 즉 음향이 있었는지도 살펴야 한단 것이다.
반면 유죄로 보는 판사들은 벨소리 설정 여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 이민구 판사는 “사회평균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지속적·반복적 전화 발신으로 인한 전화기 벨소리,부재중 전화 표시 등을 인식한 것만으로도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했다(지난 3월 31일 선고).

③ 전화기 자체 기능일 뿐 VS 그게 도달

피해자의 휴대전화에서 울린 벨소리나 ‘부재중 전화’ 표시 자체는 가해자가 보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부재중 전화를 스토킹 범죄로 보지 않는 판사들이 있다. “피해자의 휴대전화 벨소리 또는 진동 기능 작동은 전화기 자체의 기능 또는 통신사의 부가서비스에서 나온 것이지 피고인이 도달하게 한 것이 아니다(광주지법 지난 2월 15일 판결)”는 것이다.
반면 부재중 전화도 스토킹 범죄라 보는 판사들은 ‘도달’의 의미를 달리 본다. 대전지법 공주지원 도영오 판사는 “도달하게 한다는 것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피해자가 그 전화 사실을 바로 접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충분하다”고 했다(지난 2월 28일 선고) 대구지법 2-3부(이윤직·이영화·손대식)은 “스토킹처벌법에서 말하는 전화는 행위자의 전화뿐 아니라 상대방의 전화도 포함되며, 피해자의 전화기에 나타난 표시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전화를 이용하여 피해자에게 도달하게 한 글 또는 부호’”라고 설명했다.

④ 입법으로 바로잡아야 VS 입법 취지 따라야

지난 1월, 부재중 전화를 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인천지법 유승원 판사는 “피해자가 전화를 받으면 범죄에 해당하고 받지 않으면 범죄가 되지 않는 건 부당하다”는 검사의 주장에 대해 “입법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형사법의 확장 해석을 통해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고 했다. 지금 스토킹처벌법으로는 부재중 전화를 유죄로 판단할 근거가 없어, 법을 개정해야 한단 얘기다.

반면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유죄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서울남부지법 김동진 판사는 “스토킹처벌법의 제정 목적 및 입법취지에 비추어볼 때, 형식적인 법률규정의 문언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고 법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유연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지난달 5일 선고)

스토킹처벌법은 지난 2021년 3월에 통과됐다. 사진은 당시 본회의 모습. 오종택 기자

스토킹처벌법은 지난 2021년 3월에 통과됐다. 사진은 당시 본회의 모습. 오종택 기자

용어사전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2조

1항:스토킹행위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아래 행위를 해 상대방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접근하거나 따라다니거나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주거 등(=주거·직장·학교·그밖에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소 또는 그 부근)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행위 
㉰ 우편·전화·팩스·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물건·글·말·부호·음향·그림·영상·화상(물건 등)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
㉱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하여 물건 등을 도달하게 하거나 주거 등에 이를 두는 행위 
㉲ 주거 등에 놓여져 있는 물건 등을 훼손하는 행위

2항:스토킹범죄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스토킹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엇갈린 하급심 판단이 이어지자 정치권에서도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내놓고 있다.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은 “현장에서는 공포심·고통을 느끼는데 법문이 불명확해 피해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며 “법원의 판결이 오락가락하면 수사 단계에서부터 소극적으로 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더불어민주당 이탄희·이성만·고민정 의원 등이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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