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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지렁이 울음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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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지렁이는 자웅동체다. 한 몸에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가 있으며, 짝짓기는 두 개체가 각각 보관한 정자를 교환하면서 이뤄진다. 사진은 줄지렁이 새끼가 알집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다. [사진 도서출판 자연과 생태]

지렁이는 자웅동체다. 한 몸에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가 있으며, 짝짓기는 두 개체가 각각 보관한 정자를 교환하면서 이뤄진다. 사진은 줄지렁이 새끼가 알집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다. [사진 도서출판 자연과 생태]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습니까.’ 이외수 작가의 한 줄짜리 시 ‘지렁이’ 전문이다. 인간에 대한 지렁이의 항변이다. 사람을, 자연을 위해 평생을 바쳤건만 혐오동물처럼 박대받는 그들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한다.
 전북대 농생물학과 홍용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지렁이 편이다. “우리는 지렁이를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긴 몸뚱이로 쭉쭉 흙 위를 기어가는 모양이 못마땅해서일까.” 그가 지렁이의 변호사로 나섰다. 지렁이 연구 30여 년을 정리한 신간 『지렁이 생태도감』에서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도감 발간이란 문화계의 흙바닥을 다지는 ‘지렁이 출판인’ ‘지렁이 학자’의 노고가 느껴졌다.

'지렁이 생태도감' 속 고마운 존재
애니 '스즈메의…'에선 지진 일으켜
한·일 관계 다져가는 역사의 소리

 현재 전 세계에 보고된 지렁이는 6000여 종, 그중 한반도에는 200종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간 많은 지렁이가 사라졌다. 1930~60년대에 쉽게 보았던 종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급격한 개발 바람과 토양 오염에 따른 결과다. 홍 교수는 “지난 30년간 대략 30~40종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전국을 돌며 채집했지만 아직 찾지 못한 것들이다.
 지렁이도 크기·색깔 등이 제각각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스트레일리아자이언트지렁이는 길이 3m에 무게가 400~450g이나 된다. 그런데 ‘흙의 파수꾼’ 지렁이가 하는 일은 한결같다. 썩은 잎이나 죽은 뿌리, 흙 속의 미생물 등을 먹고 소화해 뱉으며 토양을 살찌운다.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노동자”라고 추앙했다.
 지렁이를 인간사에 비유하면 어떨까. 홍 교수는 ‘희생의 대명사’라고 단언했다. 지구 전 지역에 살며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시작될 장마철도 그렇다. 지렁이가 굴을 내고자 만든 수많은 구멍은 큰비가 내릴 때 물을 가두는 저수지 구실을 하며 토사 유출이나 산사태를 막아 준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아무리 힘없는 그들이라도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살 순 없을 것이다. 미천해 보일수록 더욱 존중해야 할 이유다. 지렁이에 지룡(地龍)·토룡(土龍) 같은 거창한 한자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뜻에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없을 것이다. 지렁이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난해 2월 말 타계한 이어령 박사는 “우리 농촌에선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지렁이(실은 땅강아지) 울음소리라고 했다. 지렁이가 있는 땅은 살아 있는 땅이요, 지렁이가 우는 소리는 흙을 만드는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상력을 확장하면 지렁이는 오늘날 한·일 관계를 풀어가는 열쇠 말이 될 수 있다. 500만 관객을 넘어서며 2023년 5월 현재 올 극장가 최고 흥행작에 오른 일본 애니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지진을 일으키는 괴물 벌레 ‘미미즈(みみず)’가 일본어로 지렁이를 뜻한다. 영화 속 거대 괴물은 인간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에 가깝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재앙을 틀어막으려 온천·중학교·놀이공원 등 일본 곳곳의 폐허 지역을 돌며 미미즈의 역습에 맞선다. 그 마지막 장소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도호쿠(東北) 지방이다. 과거의 재난을 애도하며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미래를 기약하는 주인공들의 고된 여정은 이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다져가려는 한·일 양국의 숙제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때마침 두 나라가 어렵게 합의한 한국의 후쿠시마 오염수 현장 시찰 장소도 영화의 마지막 배경과 겹친다. 오는 23~24일을 포함해 나흘간 일정을 확정했다. 시찰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이 조율되지 않아 우리가 만족할 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더욱이 영화와 달리 양국 정상회담에선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 일본 총리의 ‘개인적 아픔’으로 해소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를 잊은 내일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고마운 ‘지렁이’가 공포의 ‘미미즈’로 돌아서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