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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미군 위안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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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성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성민 정치에디터

윤성민 정치에디터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타는 여린 감수성’이 사라진 계기를 이렇게 말한다. “제 딸을 양갈보짓 시키지 못해 눈이 뒤집힌 여자를 어머니로 가진 여자, 그 가슴의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럽다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전쟁 중이었다. 어머니는 맏딸이었던 주인공을 유흥업소로 등떠밀었다. “우리 식군 다 굶어죽었다, 죽었다. 이 독살스러운 년아”라고 외치며.

일본군 위안부만 있었던 건 아니다. 미군 위안부도 있었다. 양공주·양색시·양갈보로 불렸다. 1950년 성매매 여성 수는 15만 명을 넘었고 이 중 절반은 미군을 상대했다. 기지촌(camp town)의 시작이다. 가족부양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던 전란 때와 사정이 달랐다. 정부의 성매매 정당화와 조장 속에서 운영됐다. 과장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이 정부의 기지촌 운영을 그렇게 판단했다. 왜 그랬을까.

미군 위안부는 가난한 나라의 달러벌이 첨병 중 한 무리였고, 미군 철수를 시사하는 닉슨 독트린이 나왔을 때 주한미군을 묶어둔 병참이어서다.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에게 영어도 가르쳤다. 강사는 위안부들을 애국자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의실 밖에선 힘없는 말이었다. 한때 최대 기지촌이 있었던 파주 용주골 주민을 인터뷰한 논문 ‘왜 미군 위안부는 잊혀야 했는가’를 보면, 주민들은 위안부로 오해받기 싫어 그들을 피해 주로 이른 아침 목욕탕에 갔다고 한다. 위안부들은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후에 목욕탕을 와서다. ‘애국자’라는 호칭과, 그들이 받았던 암묵적 괄시의 간극은 컸다.

지난 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미군 위안부를 다뤘다. 신문사 홈페이지엔 “국가가 후원하는 성노예제가 오래 지속됐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댓글이 달렸다. 외부 시선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한국인에게 미군 위안부는 여전히 낯선 단어다. “자발적 성매매 아니었냐”고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론 일자리 소개소를 찾았다가 인신매매된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엔 핏대를 세운다. 한국 정부 책임이 큰 미군 위안부 문제엔 조용하다. 암묵적 괄시는 계속되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