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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거부권 하든 안하든 파국…"환자만 황당, 타협안 찾자"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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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간호법을 둘러싼 갈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필수 의사협회장의 간호법·의료법 반대 단식에 치과의사협회장이 합류했고, 간호조무사·응급구조사·임상병리사·보건의료정보관리사 등의 보건의료연대 소속 13개 단체장과 간부들이 릴레이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반대 측에선 한의사협회가 간호법에 찬성 입장을 밝혔다. 또 간호조무사의 학력 상한(고졸)을 하한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에 반대해 전국직업계고 간호교육교장협의회·고등학교간호교육협회·한국간호학원협회 등이 시위에 나섰다.

보건복지의료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가진 더불어민주당 규탄대회에서 간호법 폐기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보건복지의료연대 회원들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가진 더불어민주당 규탄대회에서 간호법 폐기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거부권? “어느 방향이든 파국, 환자 피해”

간호법은 4일 정부로 이송됐고, 15일(휴일 포함) 이내 윤석열 대통령이 공포하거나 거부권(재의 요구)을 행사해야 한다. 거부권 행사 여부는 국무회의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16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처리 시한이 이달 19일이지만 실제로는 열흘 정도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거부권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 간에 파국이 예상된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에서 ‘재표결 후 폐기’라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간호사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간호법을 시행하면 보건의료연대 소속 13개 단체가 17일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예고한 상태라 환자 피해가 불가피하다. 2020년 의사 파업과 달리 이번에는 치과의사·임상병리사·요양보호사 등이 동참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혼란을 겪게 된다. 보건의료연대는 이에 앞서 11일 2차 부분파업을 벌인다. 치협은 이날 전면 휴진에 들어간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회관 앞 농성장에서 순천향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이 회장은 간호법 의료인면허취소법 저지를 위해 8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뉴시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회관 앞 농성장에서 순천향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이 회장은 간호법 의료인면허취소법 저지를 위해 8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뉴시스.

환자들에겐 정말로 황당한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간호법이 시행되면 환자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다”며 “둘 다 환자를 내세우지만, 직역의 생존을 지키려는 게 목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신영석 한국보건행정학회장은 “양 쪽이 퇴로를 끊고 싸우고, 거부권이 논의될 정도의 일인가. 국민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김윤(의료관리학)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이번 싸움이 환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간호법은 31개 조로 돼 있다. 23개 조항은 의료법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1개 조항은 용어만 바뀌었다. 새로운 건 7개 조항이다. 간호조무사협회 설립, 간호사 지원 관련 국가 및 지자체의 책무, 간호사 등의 권리⋅책무, 인권침해 금지, 일⋅가정 양립 지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럴 만한 일인가”라는 신영석 회장의 한탄이 나오는 것이다.

돌봄은 팀플레이…직역 갈등시 요원

거부권을 행사하면 간호법은 물 건너 가게 된다. 대통령실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지만 거부권 행사 쪽에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면 간호법 제정 논의가 처음 시작된 2005년으로 되돌아간다. 21대 국회에서 되살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실익은 없고 분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코로나19의 영웅’이라는 이미지도 퇴색할지 모른다.

지난 3일 오후 국회 인근에서 열린 '간호법·면허박탈법 강행처리 더불어민주당 규탄대회'에서 간호법 반대 단식 농성 중이던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곽지연 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일 오후 국회 인근에서 열린 '간호법·면허박탈법 강행처리 더불어민주당 규탄대회'에서 간호법 반대 단식 농성 중이던 대한간호조무사협회 곽지연 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간호협회는 간호법을 ‘부모돌봄법’이라고 홍보한다. 그렇지만 법 조항 어디를 봐도 그리 해석할만한 게 없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더 일찍 경험한 선진국을 보면 돌봄은 팀 플레이(Team play)이다. 일본의 지역포괄케어는 민간과 지자체가, 의사·간호사·요양보호사·사회복지사·재활치료사·운동치료사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주변 직역과 갈등을 안고 출발하면 팀플레이가 될 수 없다.

지역포괄케어는 환자가 사는 곳에서 편하게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받다가 임종을 맞는 걸 목표로 삼는다. 돌봄 계획을 짜고 환자와 서비스제공자의 중간에서 조율하는 사람이 케어매니저이다. 한국엔 없는 직종이다.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 등이 할 수 있지만, 간호사가 많다. 간호사가 의사의 지도를 받아서 리더십을 발휘한다. 신영석 회장은 “고령화 시대의 지역 돌봄의 핵심은 간호사이다. 다만 외국의 예를 보면 협업이 중요하고, 시스템화돼 있다”고 말한다.

“국민에 도움 안 되는 법, 혼란만 야기”

간호법에 불을 붙인 민주당은 정치적으로 ‘꽃놀이패’를 쥐었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간호법 덕분에 내년 총선에서 간호사가 표를 줄지 모르겠지만, 의사·간호조무사 등의 다른 직역에서 더 반감을 살 수도 있다. 국민에게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법률 때문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대전충남지부 등 13개 단체 보건복지의료연대 구성원들이 3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간호사특별법 폐기와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대전충남지부 등 13개 단체 보건복지의료연대 구성원들이 3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간호사특별법 폐기와 더불어민주당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신 회장은 “거부권이 어느 쪽으로 가도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직 열흘이 남았으니 정치권이나 관련 협회가 한 발씩 물러서서 타협안을 도출하면 된다”고 권고한다. 김윤 교수는 “간호법 반대자의 의구심을 해소하고, 간호사가 원하는 걸 성취하는 근본적인 대안을 정부가 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응급구조사·임상병리사 등은 간호사가 업무 범위를 공격적으로 확대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할 것이라고 우려한다”며 “이번 기회에 각 직역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면 이런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간호법에는 간호사 업무 범위를 1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규정한다고 한다. 현행 의료법에는 각 직역의 업무 범위를 몇 줄로만 규정한다. 모호하다. 그래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거의 1962년 조항 그대로다. 김 교수는 “일반인과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직역별 위원회, 이런 걸 총괄하는 상위위원회를 만들어 분명히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 사이타마현 센트럴병원의 지역포괄케어 담당 데하리 유키는 지난해 12월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2025년 단카이세대(1947~49년생 베이비부머)가 75세가 된다. 3년 안에 지역포괄케어를 완성해야 한다”며 절박함을 토로했다. 한국은 2030년이 그때다. 그런데 사생결단 싸움만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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