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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이해관계 첨예할수록 정부보다 전문기구가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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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사회 통합 없이 미래 없다

오종남 인간개발연구원 회장·전 IMF 상임이사·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오종남 인간개발연구원 회장·전 IMF 상임이사·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5%로 낮추었다. 2022년 4월 이후 매 분기 발표 때마다 전망치를 낮춘 IMF의 한국의 성장률은 1년 전 2.9%에서 1.5%로 떨어졌다.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항상 높이 평가하던 IMF가 연속 4회 경제성장 전망을 낮추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밖에서는 대한민국을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사례로 지목한다. 돌이켜보면 1961년 경제기획원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을 내놓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세계은행이 정한 빈곤선인 하루 1달러, 연간 365달러에 도달한 것은 1973년의 일이었다. 이어서 오일쇼크, 외환위기 등 수많은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2017년에는 3만 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또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되돌린 87년 13대 선거부터 작년 20대 선거까지 아무리 근소한 표차라 하더라도 대선 결과에 불복한 사례는 없었다.

우리 사회의 이념·빈부·노사·세대 갈등은 심각한 수준
정부가 직접 해결하려 하면 정쟁으로 비화할 수 있어
스웨덴은 새 법안·정책을 전문기구가 검토하도록 해
검토 결과 나오면 여·야와 국민이 수용하는 것이 관례

이를 지켜본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빈곤에서 다이어트(from poverty to diet)로 탈바꿈한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함께 이룩한 나라로 간주한다. 국토 면적은 세계 100위 안에도 못 들 만큼 좁은 나라지만, 인구는 5155만 명으로 세계 29위국, 국내총생산(GDP)은 1.7조 달러 수준의 세계 10위권 국가다. 1.4조 달러(2022년) 규모의 무역액은 세계 8위국이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우리나라를 선진국 그룹으로 격상시켰다. 64년 이 기구가 설립된 후 선진국 지위로 격상된 경우는 한국이 처음이다.

정책 초기부터 이해관계자 참여해야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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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1인당 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삶은 1994년 1만 달러일 때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내 집 마련이 더 힘들어졌고 생활비 부담이 힘겹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줄곧 OECD 국가 중 최악이다.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해서 개인의 행복이나 후생 수준이 저절로 나아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1인당 소득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많은 사람이 삶의 희망을 잃게 된다면 그런 ‘고소득 국가’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1908~2006) 교수는 1958년 펴낸 『풍요로운 사회』(The Affluent Society)에서 무절제한 성장 지상주의가 아니라 절제된 사회와 공공선을 지향할 것을 주창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근소한 표차로 승패가 갈린 사실은 우리 사회가 첨예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증거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22년에 발표한 『2021년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인식하는 사회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유형별로는 보수와 진보 간 이념 갈등이 가장 심하고 빈부 갈등, 노사 갈등, 세대 갈등이 뒤를 잇는다. 이는 이해 당사자들의 자기 이익 추구 경향, 개인이나 집단 간의 상호이해 부족 등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학문적으로 사회 갈등은 ‘사회집단이 권력, 사회적 지위, 희소한 자원 등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 집단을 의식하며 서로 경쟁하는 상태’를 지칭한다. 다양한 이익 추구와 의견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갈등을 제대로 관리만 한다면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사회 갈등의 해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거나 사회 결집력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이념·빈부·노사·세대에 이르기까지 갈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둘로 편을 갈라서 서로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경향이 지나치다. 지방자치단체끼리 지역주의로 대립하는가 하면, 이익 단체나 시민단체끼리 상대방을 비난한다. 끊이지 않는 사회 갈등이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선진국도 정치, 노사,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을 겪지만, 타협과 화합·중재 등을 통해 갈등에 따른 위기를 넘기고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할수록 정부가 직접 나서기보다 전문 기구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려고 시도한다. 그 덕분에 일단 도출된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가 확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정책의 준비 단계부터 이해관계자를 참여시켜 나중에 나타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기도 한다.

네덜란드, 국책사업 초기 여론 청취

스웨덴의 경우 새로운 법안이나 정책을 제안하면 국가조사위원회라는 기구의 검토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국민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지 등을 조사한다. 결과가 나오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반 국민도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네덜란드는 대형 국책사업의 계획 단계부터 국민 의견을 청취하여 최적의 결론을 얻어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선진국의 사례는 신뢰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합리적으로 타협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지금이야말로 사회 통합에 힘을 쏟을 때다. 우리나라는 지금 온 나라가 사실상 반으로 갈라져서 서로 반대편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다. 전 국민의 역량을 결집해도 치열한 국제 경쟁을 헤쳐 나가기가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누구를 위한 분열이며 갈등인가? 이익 집단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맨커 올슨(1932~98)은 1982년 펴낸 『국가의 흥망성쇠』(The Rise and Decline of Nations)에서 독일과 일본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두 나라는 이익 단체들의 치열한 경쟁이 자국에 많은 해악을 끼치는 상황이었으나 2차 대전 패배 뒤 이 단체들이 해체돼 빠르게 경제 재건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통합이 관건이다. 사회 갈등이 집단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수단이 되어 사회 통합을 해치는 한 우리나라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해 당사자 간에 상호 신뢰와 관용의 정신에 입각한 토론과 소통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IMF가 경제성장 전망을 더 이상 연속해서 낮추지 않는 통합된 민주 국가 대한민국을 위해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뢰는 경제성장과 공동체 위한 필수 요건

개인이든 집단이든 서로 이익이 맞설 때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1952~) 교수는 1995년에 펴낸 『신뢰』(Trust: the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에서 “신뢰란 국가 발전을 위한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가 그 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다. 서로 신뢰하면 상호 호혜와 협력이 촉진돼 공동체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신뢰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사회 복지, 건전한 공동체를 위한 필수 요건이라는 것이다.

공자도 논어 안연(顔淵) 편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정치에 관해 묻는 자공에게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대를 충분히 하며, 백성의 신뢰를 얻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부득이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릴 것인가를 묻는 이어진 질문에 군사, 식량, 신뢰의 순서라고 답했다. 백성의 신뢰가 없이는 나라를 지탱하지 못한다(民無信不立)는 경고인 셈이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높일 수 있을까?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조화롭게 통합된 사회를 지향하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믿음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타협하는 심성을 기르게 할 필요가 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함께 의무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선진국은 어릴 적부터 민주시민으로서의 덕성을 갖추게 하여 개인의 발전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갈등이 효과적으로 해결되도록 꾀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더욱 절실하다. 어렵게 이룩한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신뢰를 바탕으로 잘 지켜가면서 더불어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꿈을 꾼다. 이를 위해 각자가 벽돌 한 장씩 쌓는 자세로 나부터 신뢰 회복에 앞장설 것을 간절한 심정으로 제안한다.

오종남 인간개발연구원 회장·전 IMF 상임이사·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