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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민주주의의 위기? 이토록 낯익은 낯설음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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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다중위기의 시대, 어떻게 넘을 것인가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정치학

세계와 인류가 온통 격동하고 있다. 익숙해질라치면 어느덧 지나가고, 새것인 듯 돌아보면 어느새 옛것이 되어가고 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신속히 적응해야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과 기계 얘기가 아니다. 자주 바꿔쓰는 작은 물건과 첨단 상품 얘기는 더욱 아니다. 비교적 크고 거시적인, 때로는 안정적인 지반과 구조를 갖고 있다고 인식해온 국제정치와 세계질서와 인류 실존의 얘기다. 단위가 개인·가족·기업이 아니라 국제·세계·인류 차원인데도 변화의 폭과 속도는 도무지 너무 크고 너무 빠르다.

미·중 격돌로 국제정치 대혼돈
포퓰리즘, 극우 확산 우려 높아

위기가 위기 낳는 되먹임 고리
기후·난민·정치 등 연쇄적 충격

위기는 곧 성찰과 기회로 연결
자유와 평등은 양보할 수 없어

10대 위기 중 6개가 기후 관련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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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포럼의 최고 전문가들은 우리 인류가 놓여있는 오늘의 상황을 한마디로 다중위기·다두위기(polycrisis)라고 표현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다중위기에 놓여있다.” 생활비, 건강, 식량, 사회적 동요, 에너지, 생물종다양성, 대규모 난민, 환경시스템을 포함하여 그 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들이 말하는 10대 위기 중 무려 6가지가 기후 관련 위기다.

달라이 라마와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미 우리의 상황을 ‘기후위기’ 대신 ‘기후지옥’(climate hell) ‘기후응급상황’(climate emergency)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인류는 지금 응급처치가 필요한 응급실에 놓여있는 것이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오늘의 기후상황에 비추어 적절한 경고로 들린다. 위기가 위기를 낳고, 재난이 재난을 낳는 이른바 ‘위기의 되먹임 고리’ ‘재난의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를 말하는 진단도 다수다.

일군의 국제정치 이론가들은 진지하고도 발 빠르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종언이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근대 이후 두세 번 크게 등장했다가 지나갔던 ‘서구의 조락’(凋落), ‘서구의 후퇴’ 담론도 때 이르게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절정의 서구 지식과 과학, 절정의 서구 기술과 디지털 문명 시대에 듣는 반복되는 어색함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단일 패권론은 이제 옛말

그러니 미국 단일패권 언설들은 벌써 옛 담론이자 향수가 되었다. 요컨대 한때 온 세계를 휩쓸었던 ‘미국 단극질서’ ‘유일 패권’ ‘유일 제국’의 그 많은 주장은 지금 책상 밑으로 들어간 상태다.

심지어 중국의 부상을 몽골제국의 유럽 침략,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에 이은 또하나의 황화(黃禍)로 보는 시각도 등장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종언으로서의 역사 종언을 말한 게 엊그제이거늘 이제는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종언 위기를 말하는 지독한 역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딱 한 세대만이다.

물론 핵심은 중국의 급속한 제국으로의 부상과 미·중대결 구도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의 시대를 미래를 좌우할 ‘결정적 10년’이라고 부른다. 향후 국제사회에서 미·중 갈등과 대결의 파고가 점점 높아질 것임을 예고하는 언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오늘의 세계가 대면한 격변 상황을 한마디로 ‘대시대전환’ ‘대지각변동’(Zeitenwende/epochal tectonic shift)이라고 부른다.

‘충분한 민주주의 국가’ 14%에 그쳐

새 주장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된 담론처럼 들리는 민주주의 위기, 민주주의 조종, 민주주의 죽음과 같은 담론들 역시 이제는 더 깊고 더 넓다. 이 민주주의 위기론은 정통파 이론들과 급진파 이론들이 모두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일시적이거나 상황적이지 않은, 즉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세계적인 포퓰리즘 및 극우주의의 확산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오래된 안정적 민주주의 국가들도 다수 포함된다.

심지어 이제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수출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현지 내부의 목소리들도 종종 들린다. 신흥 민주국가들 중 권위주의 통치로 돌아간 사례는 허다하다. 한 권위 있는 정례조사에 따르면 ‘충분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2022년의 경우 167개국 중 단지 24개국, 전체의 14.4%에 불과하며, 인구로는 단지 인류의 8%에 불과하다. 바로 한 세대 전에 “자유민주주의 만세!” “민주주의여, 영원하라!”와 함께 넘치는 승리주의와 역사종언(론)을 외쳤던 때와는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의 깊고 예리한 통찰

우리 인류는 사회주의 붕괴와 냉전 해체 이후에만 해도 온갖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예측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많은 예측과 전망 중에서도 이토록 빨리 민주주의 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 미국과 서구, 그리고 환경·기후·생태 상황과 위기가 오늘과 같은 속도로 심각해질 줄은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하나의 변화와 사태를 막 넘은 듯하면 또 다른 종류와 파고의 그것들이 곧바로 밀어닥치고 있다.

오늘의 거의 모든 지식과 학문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한 학자는 오늘 인류가 직면한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두고 일찍이 ‘낯익은 낯설음’(영어 uncanny, 독일어 unheimlich,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 ‘낯설은 낯익음’으로 바꿔도 차이가 없다. 인간의 인식과 현상에 대한 그의 통찰은 깊고 예리하다. 우리의 체제·가치·국제관계·세계질서·인류·환경·지구가 모두 낯익은 낯설음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진짜로’ 익숙했던 우리의 이웃과 인간관계, 그리고 고향과 나라에 대해서는 더 자주, 그리고 더 깊게 낯익은 낯설음을 경험하곤 해왔다.

이제는 인류를 항상 변함없이 품어주고 안아줄 줄만 알았던 저 대자연과 지구행성 역시 어느덧, 일정한 규칙을 갖는 ‘법칙’과 ‘현상’이 아니라 예측불가능한 ‘사건’과 ‘사고’로 다가와, 지극히 낯익은 낯설음을 반복하는 존재로 우리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형편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인위적인 질서와 공동체의 변화 속도와 정도가 던져주는 낯익은 낯설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익숙한 듯하면 낯설고 낯설은 듯하면 익숙해지는 상황의 반복인 것이다.

종교가 가르치는 불변의 진리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지평에서 볼 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다중위기는 오히려 다중성찰의 계기이기도 하다. 위기라는 말이 성찰·비판과 같은 출발을 갖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로부터 기회라는 뜻이 파생되었음은 물론이다. 위기가 초래하는 변화는 응고의 요동이자 변동이며 단단함의 흐트러짐이자 열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중 열림은 기존질서의 다중적 흐트러짐과 함께 오기 때문에 다중 위기 및 기회와 같이 온다.

즉 다중위기는 다중기회를 의미한다. 원래 전체의 문은 다른 어떤 문보다도 좁다. 좁을 뿐만 아니라 자주 열리지조차 않는다. 워낙 촘촘하고 오래된, 굳고 단단한 위계와 질서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열리면 아주 크게 열린다. 가장 큰 깨달음을 의미하는 종교와 진리가 전체의 배움, 전체에의 열림의 뜻을 갖는 이유다.

따라서 한번 열렸을 때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 때까지의 기다림은 너무 멀다. 비록 백마가 문틈으로 달려가듯 빨리 지나칠지라도 우리가 그 좁은, 동시에 빨리 닫히는 문틈으로 재빨리 발을 집어넣어 역사의 문틈이 다시 닫히는 것을 막아야 하는 이유다.

문명과 나라의 발전은 언제나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이 강한 때와 장소에서 일어났다. 경제·군사·지식·과학·기술·정치 모두 같다. 보편적 가치와 사유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선현들의 통찰을 따를 때 여기에서 예외는 없었다. 누가 더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이성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 누구는 국가일 수도, 문명일 수도, 체제일 수도 지역일 수도 있다.

인류가 반성한 만큼 역사도 발전

그러나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궁극적 인간성의 추구와 실현이라는 목표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오늘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위기론도 깊이 읽어야 한다. 자만과 자고는 언제든 패망의 지름길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낯익은 근원을 잘 살펴야 한다.

물론 근본적 위기를 초래한 낯설은 요인들도 더욱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낯익음으로 다가올 낯설음을 준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낯익음에서 낯설음을 수용하고, 낯설음에서 낯익음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앞 선현의 통찰처럼 인류는 딱 그 능력만큼만 문명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개인도 나라도 똑같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