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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수가 부총리에 건넨 동양란…화분에 담긴 '특별한 흙' 정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재욱 경북 칠곡군수(왼쪽)가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게 동양란을 전달하고 있다. 이 화분에는 다부동전투 현장의 흙이 담겨 있었다. 사진 칠곡군

지난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재욱 경북 칠곡군수(왼쪽)가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게 동양란을 전달하고 있다. 이 화분에는 다부동전투 현장의 흙이 담겨 있었다. 사진 칠곡군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서울정부청사. 김재욱 경북 칠곡군수가 특별한 동양란 화분 하나를 품에 안고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찾았다. 6·25 한국전쟁 당시 전세를 바꿨단 평가를 받는 ‘다부동전투’ 현장의 흙으로 채운 화분이었다.

전쟁 흐름 바꾼 다부동전투 

다부동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중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칠곡 왜관읍과 가산면 다부리 일대에서 1950년 8월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과 북한군 제1·3·13·15사단이 격돌한 전투다. 이 전투로 한국군 1만여 명, 북한군 1만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다부동 일대를 지켜낸 끝에 유엔(UN)군은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다부동전투는 6·25 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전투로 전해진다.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지형상 아군은 10㎞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했다. 이후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고 전쟁의 결과도 달라질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패망의 큰 원인이 된 베르됭전투와 닮았다고 해서 다부동전투를 ‘동양의 베르됭전투’라고도 부른다.

지난해 6월 30일 김지영 독도사랑예술인연합회장이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서예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6월 30일 김지영 독도사랑예술인연합회장이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서예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뉴스1

다부동대첩으로 명칭 변경을 

김 군수가 이 흙을 담은 동양란 화분을 챙겨온 것은 6·25 전쟁 당시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이자 3대 전승의 하나인 다부동전투를 ‘다부동대첩’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수록해 줄 것을 건의하기 위해서였다.

대첩(大捷)은 사전적 의미로 ‘큰 승리’를 뜻한다. 살수대첩(612년), 한산도대첩(1592), 청산리대첩(1920) 등이 대표적이다. 전투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거나 일반적인 싸움이 벌어졌을 때 칭하는 것으로, 대첩과 비교하면 그 싸움의 의미도 작다고 평가된다.

김 군수는 ‘부총리님 다부동전투를 기억해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리본을 화분에 붙여 이 부총리에게 전달하며 다부동전투의 의미를 설명했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승비. 송봉근 기자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승비. 송봉근 기자

그는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평화와 통일만큼 호국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대한민국은 다부동전투 승리로 지켜낼 수 있었기에 반드시 역사 교과서에 수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부동전투는 단순한 전투의 의미를 넘어서는 구국(救國)의 전승”이라며 “다부동전투의 의미와 가치 전달을 위해 다부동대첩으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 부총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소중함과 올바른 국가관 형성을 위해 교과서 수록을 적극 검토할 계획”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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