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마나 수행평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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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서울 S중학교 2학년 이모(15)양은 얼마 전 '한문 수행평가'라는 명목으로 사자성어 받아쓰기 시험을 치렀다. 두 단원이 끝날 때마다 실시하는 이 시험은 한 학기에 4~5번가량 보며 기말 성적에 20% 반영된다. 이양은 "말이 수행평가지 중간.기말고사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시험 횟수만 늘어난 셈이다. 학력평가 중심의 지필고사에서 벗어나 학생의 창의력.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자는 취지로 1999년 전국 초.중.고에 도입된 수행평가가 교육 현장에서 크게 변질되고 있다.

학생들이 돈을 주고 학원에 과제를 의뢰하는가 하면 교사들은 평가 공정성 시비를 꺼려 단순 암기식 문제를 수행평가로 내놓는 사례가 늘어 '무늬만 수행평가'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 돈 주고 사는 수행평가=수행평가를 대행해 주는 업체나 학원엔 '수채화 5만원''과학 보고서 4만원' 식으로 과제 유형별로 단가가 매겨져 있다. 강남의 한 학원 관계자는 "강사 20여 명으로 꾸려진 '수행평가 전담반'을 꾸렸다"며 "박물관 견학 과제도 사진까지 첨부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준다"고 밝혔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독후감.가족신문 등을 건당 500원이면 내려받을 수 있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한 수행평가 대행 사이트엔 각종 독후감.감상문.기행문.영어일기 등 모두 6만5000여 건의 글이 올라 있다. 이 사이트를 이용한 S초등학교 6학년 김모(12)양은 "독립열사에 대한 조사가 과제로 나왔는데 500원씩 내고 여러 편을 내려받아 짜깁기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중1 아들을 둔 서울 강남지역 주부 김모(37)씨는 "수행평가에 시간을 뺏기면 안 된다는 게 요즘 학부모 분위기"라며 "돈이 들더라도 학원에 맡기고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일선 교사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울 K초등학교 정모(40) 교사는 "수행평가 계획서를 학기 초에 내주면 학부모들이 직접 미리 준비를 하기 때문에 가급적 그때그때 과제를 내주고 있다"며 "학부모들과 두뇌게임을 벌이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 창의성보다 점수 매기기 편한 과제로=과제물 점수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반발도 수행평가 퇴행의 원인으로 꼽힌다. 분당지역 초등학교 교사 최모(43)씨는 몇 년 전까지 수행평가 과제로 '통일 이후를 가정해 친구들과 신문 만들기' 등 창의적인 과제를 내주다 지금은 단어시험으로 대체해버렸다. 최 교사는 "'왜 우리 애 점수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따지는 학부모들을 피하려면 점수가 객관적으로 나오는 시험이 낫더라"고 말했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수행평가를 대신하는 학교도 있다. 서울 K고 2학년 최모(17)군은 "3월 실시한 수능 모의고사의 언어영역 점수가 수행평가를 대신해 1학기 국어 내신성적에 20% 반영됐다"고 말했다. 교사들도 이 같은 방식이 채점시간도 줄이고 점수화가 간편해 선호한다고 한다. 박범익 EBS심의위원은 "2008학년도부터 학생부의 비중이 커지면서 수행평가가 더욱 중요해졌다"며 "제대로 된 수행평가의 모델을 확립하지 못하면 수행평가가 교사와 학생에게 불필요한 부담만 안기는 제도로 전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입시학원 강사는 "학생 수가 많고 입시 부담감이 워낙 큰 우리 교육 여건에서 수행평가는 이상에 치우친 제도"라고 지적했다.

김호정 기자

◆ 수행평가=지식을 평가하는 기존의 지필고사와 달리 실험.관찰 보고서, 토의 과정, 실기 등 학생의 실제 행동을 보고 성취도를 측정하는 평가방식. 학생이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를 평가해 창의력을 키워주는 게 목적이다. 교육부는 과목마다 수행평가 점수를 30% 이상 반영토록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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