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부순 첫 흑인 슈퍼스타…'바나나 보트송' 벨라폰테 별세

중앙일보

입력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미국 대중문화계 정상에 섰던 가수 겸 배우 해리 벨라폰테가 96세 나이로 별세했다고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이 보도했다. EPA=연합뉴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미국 대중문화계 정상에 섰던 가수 겸 배우 해리 벨라폰테가 96세 나이로 별세했다고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이 보도했다. EPA=연합뉴스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중문화계 정상에 서며
미국의 인종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 가수 겸 배우 해리 벨라폰테가 세상을 떠났다. 96세.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CNN 등은 "벨라폰테가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벨라폰테는 흑인 역사상 미국에서 처음으로 스타덤에 오른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56년 카리브풍의(중앙·남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정서에 팝·재즈를 접목한 음악을 담은 앨범 '칼립소'를 발표했다. 수록곡인 자메이카 민속 노동요 '더 바나나 보트 송(데이-오·Day-O)'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앨범은 1년 만에 100만장 이상 팔렸다. 바나나 농장에서 수확한 푸른 바나나를 보트에 실으며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칼립소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31주 동안 올랐다.

1956년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해리 벨라폰테의 모습. AP=연합뉴스

1956년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해리 벨라폰테의 모습. AP=연합뉴스

앞서 53년엔 미국과 카리브해 민속 음악을 해석한 가극으로 흑인으로는 최초로 브로드웨이 연극상인 토니상을 받았고, 59년엔 흑인 미국인의 삶과 역사를 다룬 음악 프로그램 '투나잇 위드 벨라폰테(Tonight with Belafonte)'로 에미상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중산층에게도 인기 있는 가수는 벨라폰테 전엔 없었다"며 "그는 변화의 주체이자 시민권을 음악으로 표현한 목소리였다"고 평했다.

그는 유쾌하고 관능적인 매력을 선보이며 TV·영화계에서도 활약했다. 미국에선 57년에서야 영화·드라마 속 흑인과 백인 간의 로맨스를 허용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그는 금지가 풀리자마자 영화 '아일랜드 인 더 선(Island in the Sun)'에서 백인 농장주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흑인 노동활동가 역할을 맡았다. WP는 "그는 50년 동안 미국에 만연한 일련의 (인종) 장벽을 부쉈다"고 평가했다.

벨라폰테는 배우·MC로 활동한 동시에 흑인 인권신장을 위한 활동가로도 일했다. AFP=연합뉴스

벨라폰테는 배우·MC로 활동한 동시에 흑인 인권신장을 위한 활동가로도 일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흑인이어서 좌절한 순간도 많았다. 68년 미국에서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NBC 심야 토크 프로그램 '투나잇 쇼'에 첫 흑인 사회자로 발탁됐을 때, 그는 인생에서 가장 쓴 경험을 했다고 회고했다. 영국 백인 가수 페툴라 클라크와 함께 공연하던 중, 클라크가 그의 팔에 닿자 쇼를 후원하던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플리머스의 광고 담당 임원은 노래를 중단시키고 재촬영을 요구했다. 이 임원은 나중에 회사로부터 질책을 받고 벨라폰테에게 사과했는데, 당시 그는 "당신의 사과는 100년이나 늦었다"고 응수했다고 한다. NBC는 이 과정을 그대로 방송했다. 벨라폰테는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상에 섰던 대중 문화예술인이었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흑인 인권 신장 운동으로 평가된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흑인 활동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68년 킹 목사가 살해당한 뒤엔 유족에게 재정적 지원을 이어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집권 시절 맨해튼에 위치한 방 23개짜리 그의 저택은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한 시위를 하다가 잡힌 활동가를 위해 사용됐다고 한다. 87년엔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돼 아프리카의 기아·질병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두 살 차이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운데)와 해리 벨라폰테(오른쪽)는 가깝게 지내며 함께 흑인 인권 신장 운동을 펼쳤다. AP=연합뉴스

두 살 차이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운데)와 해리 벨라폰테(오른쪽)는 가깝게 지내며 함께 흑인 인권 신장 운동을 펼쳤다. AP=연합뉴스

27년 자메이카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뉴욕 할렘가에서 자란 그에게 가난과 차별은 일상이었다. 카리브해 항구에 위치한 바나나보트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술을 자주 마시고 학대를 일삼았다. 어머니는 미국에 불법 체류하면서 이민 당국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성을 '벨라폰테'로 바꿨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 입대한 그는 독일 포로가 흑인 군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군에서 나와 뉴욕의 한 건물에서 수위 보조로 일하던 중, 한 세입자에게 표를 받아 생애 첫 연극을 본 그는 연기의 매력에 빠졌다. 이후 극단에서 청소 등을 하며 연기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 "겪어낸 삶을 예술에 녹여내고 싶다"며 "나는 활동가가 될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가가 된 활동가였다"고 자주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