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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류태형의 음악회 가는 길

제네바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호로비츠 콩쿠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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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류태형
류태형 기자 중앙일보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지난 21일 밤 스위스 제네바 빅토리아홀에서 호로비츠 콩쿠르 키이우-제네바 결선 무대를 봤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기리기 위해 1995년 창설된 대회다. 전쟁으로 올해는 키이우에서 제네바로 옮겨 개최됐다. 우크라이나 지휘자 키릴 카라비츠가 지휘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 우크라이나 국립교향악단의 연합 오케스트라가 결선 연주를 맡았다. 우크라이나의 로만 페디우르코(19)가 1위, 영국의 줄리언 트리벨리언(24)이 2위, 우리나라의 박경선(31)이 3위에 올랐다.

우크라이나는 클래식 음악 강국이다.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히테르, 에밀 길렐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나탄 밀스타인 등 전설의 거장이 즐비하다. 27년간 1300명 이상이 참가한 호로비츠 콩쿠르가 전쟁으로 위기에 처하고 우크라이나의 젊은 연주자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자 제네바에 본거지를 둔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의 노력으로 이번 대회가 성사됐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를 기리는 2023 호로비츠 콩쿠르 포스터.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를 기리는 2023 호로비츠 콩쿠르 포스터.

플로리안 리임(55)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 사무총장을 21일 아침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7년간 통영국제음악제의 대표를 지냈기에 우리나라 음악팬에게도 익숙하다. 통영 명예시민인 그는 “2019년 윤이상 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했던 박경선이 호로비츠 콩쿠르 결선에 올라 기쁘다”면서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전쟁은 경제적 위기,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는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연맹에서 제명했습니다. 러시아 문화성의 직속 대회이고 지금도 홈페이지에는 푸틴이 미소 짓고 있습니다. 이번 콩쿠르에는 정부가 예술가들을 이용해선 안 된다는 뜻에 세계의 젊은 연주자들이 연대하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전쟁에 굴하지 않는 예술의 모습을 목도했다. 국적을 불문하고 참가의 문을 활짝 열어 러시아 연주자가 준결선까지 진출했다. 리임 사무총장은 연맹의 정책이기도 한 ‘탈국적화(denationalization)’를 강조했다. “음악은 국경도 국적도 종교도 이념도 초월합니다. 콩쿠르 책자 어디에도 국적이 나와 있지 않죠. 참가자, 심사위원. 관계자도 마찬가집니다. WFIMC의 모든 콩쿠르는 이 원칙에 따릅니다.”

겉모습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면 위대한 음악을 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베토벤 ‘합창’의 가사에 ‘신’이 들어가 종교적이란 이유로 연주를 반대한 우리나라 어느 지자체의 모습은 유감스럽다. 좀 더 대국적이고 넓은 시야를 확보했으면 한다. 제네바에서 조국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연주자들을 보니 삶과 죽음까지, 모든 걸 초월하는 음악의 존재가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