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0년 전 일로 무조건 무릎 꿇어라 할수는 없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윤석열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해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24일 게재된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한국형 핵우산 문서화’ ‘한·미·일 정보 공유 확대’ 등 과제를 안고 미국으로 향하면서 한·일 협력의 불가피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한국시간 25일 새벽(현지시간 24일 오후)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30일까지 5박 7일 일정으로 미국 국빈방문을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약 90분에 걸친 WP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일본에 대한 결단을 길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라며 “설득은 저는 충분히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의 안보 불안이 너무나 긴급한 사안이기에 일본 정부와의 협력을 미룰 수 없었다며 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절대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 “한국의 우크라 지원, 교전국과 관계 고려 불가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하기 전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이날부터 5박 7일 일정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다. 우리 정상의 국빈 방미는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다. 강정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하기 전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이날부터 5박 7일 일정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다. 우리 정상의 국빈 방미는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다. 강정현 기자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과 북한의 전례 없는 도발로 한·일 관계 개선을 더는 늦출 수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실도 별도 언론 공지를 통해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신에 비춰봤을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며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는 과거사 문제든, 현안 문제든 소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윤 대통령이 ‘100년 전의 일’을 언급한 배경과 관련해 “이런 식의 접근이 미래 한·일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또 “한·일 관계 정상화는 꼭 해야 하며 늦출 수 없는 일”이라며 “유럽에서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듯이 한·일 관계 개선은 미래를 향해서 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온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의회 연설에서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한국형 핵우산’ 공식 문서화 막판 조율

하지만 야당은 윤 대통령의 ‘100년 전의 일’ 발언을 일제히 비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수십 년간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해 고통받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결코 해선 안 될 발언”이라며 “대통령의 역사의식이 과연 어떠한지 생각해 보게 되는 발언”이라고 말했다. 박용진 의원은 “일본 총리의 망언이라 비판해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WP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에 대해선 “우크라이나가 불법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맞다”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는 우리나라와 교전(당사)국 간 직간접적인 여러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 측의 “전쟁 개입”이란 반발을 고려해 한층 신중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선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나 국제사회에서 묵과할 수 없는 대량 학살,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적, 재정적 지원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었다.

윤 대통령은 이번 국빈 방미의 의의에 대해 “저는 이번 방미가 한·미 동맹 70주년의 역사적 의미, 성과 등을 양국 국민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미 동맹을 두고 “역사적으로 모든 동맹 중 가장 성공한 동맹이고 무엇보다 가치 동맹”이라고 강조했다.

WP는 윤 대통령이 과거 검사 시절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당시 외압에 맞서다 좌천되는 등 강직한 검사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주목받기 시작, 대권까지 올랐다고 소개했다. 윤 대통령은 “정당 간의 경쟁인 선거에 이런 기관이 조금이라도 개입하고 국민의 신뢰를 손상시킨다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다시 그때로 돌아가 또 그 입장에 처하게 돼도 역시 동일한 생각으로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나이 들어서 늦게, 50이 다 돼서 제 아내(김건희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꼽았다.

WP는 인터뷰 기사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작년 5월 첫 정상회담 때 선물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의 명패가 놓인 윤 대통령 집무실 책상 사진도 실었다.

윤 대통령은 이번 국빈 방미 중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 선제공격 시 보복 핵공격을 명시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이상의 ‘한국형 핵우산’을 공식 문서화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두 정상은 작년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겨냥해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메시지를 내고, 공동성명에 “핵, 재래식 및 미사일 방어 능력을 포함해 가용한 모든 범주의 방어 역량을 사용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공약을 확인한다”며 ‘핵’을 처음으로 명시한 바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번엔)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논의 중”이라며 핵우산의 내용을 문서로 구체화할 것임을 시사했다. 양국이 앞서 원칙적으로 합의한 ▶정보 공유 ▶협의 절차 ▶공동기획 ▶공동실행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문서화한다는 뜻이다.

북한 불법 사이버 활동 관련자 동시제재

한·미 양국은 이날 북한의 불법 사이버 활동을 지원해 핵·미사일 개발 자금 조달에 관여해온 북한 국적의 개인 ‘심현섭’을 독자제재 대상으로 동시에 지정했다. 사이버 분야에서 한·미가 동일한 대상을 동시에 제재하기로 결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심현섭은 2016년 3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조선광선은행’ 소속으로 차명계정 생성과 자금세탁 등 불법 금융활동을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자금을 조달해온 인물이다.

심현섭은 특히 신분을 위장해 해외에 불법 체류하며 각종 사이버 범죄를 벌이고 있는 북한의 IT 인력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고, 이들이 탈취한 암호화폐 등 수백만 달러의 불법 자금을 세탁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