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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한국통' 낙마...18만명 날린 '시진핑 타호박승' 시즌2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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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셔터스톡

20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셔터스톡

시진핑(習近平)은 2012년 말 중국 공산당(중공) 총서기, 2013년 초 국가주석에 오르며 중국의 공식적 일인자가 됐다. 하지만 파벌 간 세력다툼 속 어부지리로 권좌에 올랐다는 평가가 많았고 실제로 도전자들이 주위에서 으르렁거리며 그의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시진핑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꺼낸 카드는 반부패를 앞세운 대대적 숙청이었다. 충칭의 맹주 보시라이(薄熙來), 사법 권력의 지배자 저우융캉(周永康), 군부 실권자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가 줄줄이 부패 혐의로 낙마해 재판을 받았다. 중하위직 공직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타호박승(打虎拍蝇)이라 불렀다. 호랑이(虎)로 비유되는 고위직 간부와 파리(蝇)로 표현되는 하위직 공직자를 때려잡는다는 뜻이다. 시진핑은 집권 후 2년 동안 54명의 차관급 이상 ‘호랑이’와 18만 명의 ‘파리’들을 부패 혐의로 처벌했다. 이 덕분에 불안했던 그의 권력은 공고화됐고 마오쩌둥(毛澤東)에 버금가는 현재 위상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최근 중국 안팎에서 들려오는 한 인물의 숙청 소식이 타호박승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다수의 중화권 매체들이 류야저우(劉亞洲·71) 전 국방대학 정치위원이 비리 및 규율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 됐다고 전했다. 집행유예 2년이 딸린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매체도 있다. 그는 인민해방군 공군 상장(上將·대장에 해당) 출신으로 행정부 장관급에 해당하는 중공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위에서 언급한 궈보슝·쉬차이허우에 비한다면 대단치 않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홍콩 성도일보가 ‘군 내 류야저우 지우기 운동’이 시작됐다고 보도할 정도로 간단치 않은 스토리를 가진 존재다. 공산권 국가에서 존재를 삭제당하는 것은 거물급 인사가 겪을 수 있는 최고 수위의 모독으로 꼽힌다.

?류야저우(劉亞洲)

?류야저우(劉亞洲)

우선 그는 ‘성골’ 태자당이다. 부친 류젠더(劉建德)는 국공내전과 6·25 전쟁에 참전한 혁명원로다. 장인은 중공 8대 원로 중 한 명이자 문화혁명 때 폐지됐다가 8년 만에 부활한 국가주석직에 오른 리셴녠(李先念)이다. 3세대 최고지도자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리펑(李鵬) 전 총리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인 리샤오린(李小林)은 2020년까지 약 10년 동안 중공의 대표적 통일전선 기구인 대외우호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류야저우는 인민해방군에 입대, 영향력이 막강한 정치장교 계통에서 진급을 거듭해 최고 계급인 상장까지 올랐고 중국 권부 핵심인 중공 중앙위원을 지냈다. 8년간 국방대 정치위원을 지내며 장성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중화권 매체들에 따르면 류야저우는 1992년 한중 수교 때 ‘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9권의 문집을 낸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PEN) 클럽대회에 중국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했다. 하지만 펜 일정에 참석하지 않은 채 한국 정부 고위 관리들과 접촉했다. 귀국 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하던 ‘북방외교’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리펑 총리에게 제출했다. 그는 북한과의 관계를 걱정하던 중국 지도부에게 ‘한국과의 수교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후 류야저우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노태우 대통령과 재벌기업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SK는 류의 협력으로 한국 대기업 중 최초로 베이징에 정식 지사를 개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한·중 양국이 대사급 관계의 전 단계인 무역대표부를 설치할 때 류야저우가 주임으로 내정됐으나 ‘오랜 친구인 리셴녠의 사위가 첫 한국 대사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북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1993년 중공이 박정희 전기를 중국어로 번역해 당정 고위 간부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토록 하는 데도 류야저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그의 낙마 소식이 최근 전해진 것이다. 지난달 홍콩 명보에 따르면 류야저우는 재단·협회 등을 앞세워 거액의 재산을 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가오위(高瑜)는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서 ‘타이위안 제7간부휴양소(太原第7幹部休養所) 통지’라는 문서를 공개했다. “휴양소는 상급 기관 지시에 따라 류야저우 관련 정보를 전면 조사·제거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 이번 활동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며 엄숙한 정치 임무”라고 돼 있었다. ‘간부휴양소’는 중공이 퇴역 군인 복지를 위해 운영하는 기관이다.

같은 날 중공 내 극좌 성향 매체인 홍색문화망(紅色文化網)은 논평에서 류야저우를 “두 얼굴을 가진 사람” “‘위대한 인물’이라 자칭하지만 전형적인 야심가이자 음모론자”라고 비난했다. 그의 ‘죄목’도 밝혔다. ▶서방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우리 당의 집권 지위를 송두리째 흔든 죄 ▶‘군대의 국가화’를 호소하며 군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부정하고 ‘군사위원회 주석 책임제’에 저항·반대한 죄 ▶역사 분쟁을 이용해 당 지도부의 전략과 결정을 모함한 죄다.

매체 보도들을 종합하면 그의 강한 반골적 주장과 소신이 시진핑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신을 ‘전략가’로 자칭하며 ‘자유사상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글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유명 온라인 논객 장펑(江峰)은 “류야저우는 ‘중공이 피라미드형 지휘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현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인민해방군 해군 중교(중령) 출신 야오청(姚誠)은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시진핑은 그를 두려워하며 이번 기회에 류야저우를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야저우를 필두로 집권 3기에 접어든 시진핑의 ‘군기 잡기’가 다시 시작된 듯하다. 

18일 중국 최고 사정기관인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국가감찰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월 6일 산둥성 칭다오시의 지빈창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최소 17명의 전·현직 고위직 인사가 사정 당국의 조사 대상에 올라 낙마했다. 리샤오펑 전 에버브라이트그룹(광다그룹) 회장, 류롄거 전 중국은행 회장, 두자오차이 전 체육총국 부국장, 정훙 전 충칭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등이 대표적이다. ‘타호박승 시즌2’가 될지 주목된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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