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일본인의 사람다움과 일본의 국가다움을 묻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 정부가 징용자 문제 해법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한 지 열흘 만인 지난달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단행했다. 12년 만에 이루어진 양국 정상회담이었다. 방일 직후 거센 후폭풍이 몰아친 일대 사건이다. 정계·학계·시민사회가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펼쳤고, 국민 여론의 반발 또한 거셌다. 그 와중에 국가안보실장이 교체되고 외교라인이 조정되었다. 봄철의 황사 현상처럼 뿌연 먼지에 휩싸인 이 사건의 본질과 의미는 무엇일까.

윤 대통령 결단에 미온적 반응
기시다 총리의 역사 화해 기대
한·일관계 한 단계 끌어올려야
독일의 과거사 반성 길이 남아

징용 문제에 대한 일본 입장 포용

지난달 16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지난달 16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는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3자 변제가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 합의,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도 언급한 이 말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가 된다.

우선 윤 대통령은 징용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고 포용했다. 한국은 1965년 청구권협정을 준수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이 스스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와 동시에 윤 대통령은 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을 존중하여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한국 정부가 견지할 원칙으로 천명했다.

이 두 가지는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 협상의 논제이기에 앞서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항이다. 거래를 통해 일본과 주고받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결정할 국가의 존재 이유(Raison d’Etat)에 해당한다.

윤 대통령은 방일에 앞서 일본 언론을 통해 이 점을 명백히 표명했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책은 한국 정부가 국익의 관점에서, 국민을 위해 대국적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국제규범을 선도하겠다는 최고통치권자의 의지를 표출한 정치적 행위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이로써 대법원 판결로 야기된 법적 문제가 해소되고 양국 간 경제·안보 현안도 해결의 길로 들어섰다. 나아가 한·미·일 삼각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로드맵도 그려졌다. 대통령이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비장한 각오로 내린 선제적 결단을 평가하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

윤 대통령의 포용적 결단이 보여준 가장 큰 의미는 제3의 한·일 역사 화해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65년의 국교정상화가 첫 번째 역사 화해였고,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이 두 번째 역사 화해였다면, 윤 대통령은 세 번째 역사 화해를 향한 출발선에 섰고, 동시에 기시다 총리를 출발선에 세웠다.

한국민은 기시다 총리의 말 기다려

오는 5월 히로시마에서 개최되는 G7 이후, 기시다 총리의 답방이 있을 것이다. 한국 국민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 한국이 요청해온 성의 있는 호응을 기시다 총리가 결단한다면 역사 화해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반면 진전된 표명 없이 그저 만찬을 즐기고 돌아간다면 윤 대통령의 결단은 빛이 바랠 것이고, 역사 화해는 시야에서 멀어질 것이다. 나는 현재로선 기시다 총리가 이번 답방에서 한국이 흔쾌히 납득할만한 호응의 표현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 기시다 총리와 일본 국민에게 내 생각을 전하고 싶다.

일본은 윤 대통령이 열어 놓은 역사 화해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일본에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관계 개선을 바라는 많은 한국인은 지금 당장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청구권협정에서 미진하게 처리된 사안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고, 그에 합당한 금전적 배상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가 옳지 못했다는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의식이 새겨져 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 아래 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행한 죄악은 그 어떤 조약이나 협정, 사죄와 배상으로 지워지지도 덮어지지도 않는다. 그것 자체는 어떤 화해로도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인류 공동체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일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영원한 짐이다.

국제법의 그늘막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다른 누구도 이 짐을 덜어주지 않으며 흘러간 시간이 이 짐을 벗겨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식민 지배가 남긴 피해자 의식에 기반하는 트라우마와는 다른,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유래하는 국민 정서의 한 부분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의식에 일본인이 공감하는가를 묻고 있다. 나아가 이해를 표명하고 공감의 뜻을 전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움의 표출이고 총리의 지위에서 나오는 국가다움의 표현이라고 한국인은 생각한다.

메르켈 총리가 박수 받은 이유

방한을 앞둔 기시다 총리에게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사고와 행위는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2008년 메르켈은 예루살렘에 있는 크네셋(Knesset·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연설했다. 여섯 명의 의원이 항의하며 의사당을 박차고 나갔다.

메르켈은 겸손하게 꾸밈없는 연설을 이어갔다. “문명을 거부한 사건인 홀로코스트는 많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동독에서 자란 저는 독일의 역사적 책임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저는 이 역사적 책임이 제 조국 독일의 존재 이유의 일부라는 점을 명백히 강조하는 바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이스라엘 의원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참석한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기시다 총리가 한국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오로지 그의 몫이다. 일본인의 품격과 일본의 국격을 드러낼 그의 말과 행위는 한·일 관계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