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부산·구리도 수백채…전국 전세사기 비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임대인에게 부동산이 있는데도 개인이 아닌 법인 명의라서 전세보증금 피해자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네요.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합니다.”

사회 초년생인 20대 A씨가 B씨 소유 부산시 부산진구 오피스텔에 입주한 건 2021년 8월이다. 26㎡(8평) 크기 원룸을 전세보증금 9000만원(8000만원 은행 대출)에 2년간 계약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오피스텔 건물(69세대)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B씨 채무 때문이었다. 건물은 60억원이 넘는 근저당이 잡혀 있다.

B씨 측은 “몇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B씨의 요금 미납으로 지난해 말 수도와 전기마저 끊길 뻔했다. 최근엔 법원에서 경매 시작 통지서가 날아왔다. A씨는 “계약 전 근저당이 불안했는데, ‘건물 시세가 90억원 넘어 괜찮다’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계약했다”며 “60여 세대가 보증금도 못 받고 신용불량자가 될까 봐 잠도 못 잔다”고 했다.

A씨 등은 B씨에게 법인 소유 부동산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변호사에게 문의했지만 “전세 계약이 B씨 개인과 이뤄져 법인을 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오피스텔 세입자 피해 총액은 5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A씨는 20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장 대출금 갚을 방도가 없어 파산이나 개인회생 등을 알아보는 세입자가 많다”며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고 서로 위로한다”고 전했다.

관련기사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다세대주택 등을 사들여 임대한 뒤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전세사기 피해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주택 1139채를 보유했다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사망한 인천의 이른바 ‘빌라왕’ 사건에 이어, 동탄신도시와 부산과 구리 등지에서도 전세사기 의심 신고가 잇따랐다.

임대업자 최모씨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 강동·양천·구로·영등포·강북·강서·금천구, 경기도 부천·김포·고양시, 인천 등지에서 다세대주택을 매입해 전세를 놓았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이날 임차인 67명에게 보증금 약 140억원을 돌려주지 않은 최씨를 최근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구리선 전세 중개업자 등 20명 입건, 피해자 500명 넘을 수도

인천의 한 아파트에 20일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임을 알리는 문구가 붙어 있다. [뉴스1]

인천의 한 아파트에 20일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임을 알리는 문구가 붙어 있다. [뉴스1]

경기도 구리시에서도 전세사기 피해를 주장하는 임차인들이 대거 나왔다. 경기 구리경찰서는 이날 “전세 만기인데 보증금을 못 받고 있다”는 진정이 다수 접수돼 중개업자 등 20여 명을 형사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진정서에서 “조직적인 전세사기가 벌어졌고, 피해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피해자가 500명이 넘을 거라는 말도 나온다.

부산시 부산진구·사상구·동구에 오피스텔 등 건물 4채를 소유한 부부도 최근 연락이 끊겨 89세대 세입자가 발만 구른다. 부부가 소유한 건물 4채엔 40억원 넘게 근저당이 잡혀 있다. 세입자 대부분이 2030세대다. 계약서에 적힌 임대인 사무실 주소지엔 비닐하우스만 있다. 앞서 부산시 동래구 소재 원룸 등 오피스텔 100여 채를 소유했던 C씨가 비슷한 수법으로 전세금을 받아챙겨 잠적했다가 붙잡혀 사기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알려진 피해 세대만 200세대가 넘는다.

이처럼 전세사기 피해가 전국적으로 불거지자 당국도 심각성을 고려해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이날 전국 수사지휘부 화상회의에서 “조직적 전세사기에 범죄단체조직죄 적용을 적극 검토하고, 시·도 경찰청에서 직접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범죄단체조직죄가 인정되면 단순 가담자도 조직범죄에 준해 처벌한다. 당국이 뒤늦게 대응에 나섰지만 피해자들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현행법의 제약으로 피해 구제가 사실상 어려워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문가들은 역전세가 심화한 2020~2021년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에 따른 깡통주택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 주택의 전세 계약 만료 시점이 최근 몰리면서 사건이 속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이 국토교통부에서 제출받은 주택자금 조달계획서(2020년~2022년 8월) 161만 건을 분석한 결과, 주택 가격 대비 세입자 임대보증금 비중(전세가율)이 80%를 넘어 ‘갭투기’, 즉 이른바 깡통주택 고위험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우가 12만1553건, 전세가율이 60~80%인 잠재적 깡통주택 위험군이 11만1481건이었다. 요컨대 전국에 도사린 깡통주택 위험군이 최소 23만 가구라는 얘기다.

또 다른 위험 신호도 감지된다. 경찰청이 대통령실에 보고한 2022년 전세사기 검거 건수는 622건으로, 2021년(187건)의 3배가 넘는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연도별 보증 사고액 현황을 봐도 2022년 전세금 미반환 금액이 1조1726억원으로, 2021년 5799억원의 2배다.

이런 가운데 이날 더불어민주당 조오섭(광주 북구갑) 의원에 따르면 HUG가 이른바 ‘악성 임대인’으로 집중 관리하는 다주택 채무자가 광주·울산·세종·제주에는 한 건도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실제로는 관리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임차인의 전세반환보증보험 미가입으로 인해 실태 파악조차 안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 의원은 “잠재적 전세사기 폭탄은 수도권 등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재난 수준의 전국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