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화 끊읍시다. 이상하게 말을 돌려서 하네.”
지난 10일 홍준표 대구시장이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 도중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총선 출마 관련 질문이 계속되자 인터뷰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즉답을 피하는 홍 시장에게 진행자가 반복해 묻자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당내에선 “차기 대권을 노리는 홍 시장의 견제 심리가 여과 없이 표출된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동훈 장관은 여권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별의 순간”을 언급할 정도로 주목도가 단연 높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힘 지지층과 보수층에서 인기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한 장관이 야권의 집중 견제를 받는 사이 여권의 다른 ‘빅샷’(중요 인물)이 잇따라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
대표적인 게 홍 시장이다. 그는 최근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문제로 김기현 대표와 연일 대립각을 세우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특히, 지난 13일 김 대표가 홍 시장을 당 상임고문에서 전격 해촉한 뒤 홍 시장은 “나는 어차피 내년에 (총선에서) 살아 남는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해야 할 사람(13일)”이라거나 “보수우파 붕괴 직전의 탄핵 와중에도 묵묵히 당을 지키고 재건한 이 당의 주류는 바로 나와 책임당원(15일)”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잇따라 올렸다. 당내에선 “홍 시장 스스로 차기 대권 주자라는 걸 강조한 셈”이란 반응이 나왔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그동안 홍 시장의 가장 큰 약점은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 쌓은 강경 보수 이미지로 인한 외연 확장성 부족이었다”며 “이번 논란을 계기로 합리적 보수로까지 외연을 넓히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3·8 전당대회 불출마 뒤 한동안 잠행을 이어오던 유승민 전 의원도 최근 방송 출연이 부쩍 늘었다. 유 전 의원은 지난 16일 방송에서 “김 대표가 처음부터 (전광훈 관련) 문제는 확실히 정리해야 했다. 홍 시장 말이 맞다”면서도 “홍 시장도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태도는 고치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1월 대구·경북 지역 언론인 토론회에 이어 거듭 홍 시장을 ‘강약약강’(強弱弱強)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에도 홍 시장은 “(유 전 의원은) 연탄가스처럼 틈새만 있으면 올라온다”고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2017년 대선 때 각각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대선 후보로, 지난 대선 때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로 맞붙었던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문제를 놓고도 홍 시장은 “배신자”라고, 유 전 의원은 “수도 없이 말을 바꾼 사람”이라고 서로 비판한다. 홍 시장이 김기현 대표와 다투는 국면에 유 전 의원이 끼어든 이유에 대해 당내에선 “전당대회를 거치며 확인된 비주류 성향의 당원을 껴안으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엔 상대적으로 행정에 전념하던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공개 충돌했다. 오 시장은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국토부가 기본적 데이터도 서울시에 제공 않는다”며 부동산 실거래 정보의 폐쇄성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자 원 장관은 즉각 “개인정보를 제한 없이 제공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반박했다. 논쟁은 다음날인 14일까지 이어졌다. 원 장관이 ‘지옥철’로 불리는 김포골드라인(김포도시철도) 과밀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내놓은 버스전용차로 확대 대책 등에 대해 서울시 협조가 부족하다는 취지로 공개 비판한 것이다. 서울시는 즉각 “김포시에서 우선 설치해 분산 효과를 검증한 뒤 서울시 구간을 재논의키로 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지난 15일 서울 시내 식당에서 단 둘이 만나 향후 협력과 정기 회동을 약속하며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당내에선 두 사람의 공방을 정치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원 장관이 지난해 연말 화물연대 파업에 강경 대응해 호평을 받는 등 최근 여권 지지층 사이에서 존재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신중한 오 시장과 적극적인 원 장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 시장은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야당은 대선 불복과 다름 없는 행태를 보이고, 여당은 내부 갈등으로 국민께 걱정을 끼치고 있다”며 “이렇게 저차원의 ‘손익계산의 정치’, ‘정치공학적 정치’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오 시장 측에선 “당 내홍에 대한 걱정”이라고 설명했지만 당내에선 “홍 시장을 겨냥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홍 시장은 다음날인 18일 오전 페이스북에 “당분간 입 닫고 있겠다”면서도 “약속한 당 지지율 60%를 만들지 못하면 총선을 앞두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비상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썼다.
이같은 빅샷의 활동 반경 확대에 정치권에선 “내년 4월 총선을 노린 정지 작업”이란 분석이 나온다. 총선 때 자기 사람을 얼마나 공천하는지가 향후 당내 입지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동시에 떨어지는 상황에서 “여권 내 ‘대안 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라는 관측도 있다.
다만, 여권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빅샷의 갈등 구조가 윤석열 정부에 부담이 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윤 대통령의 멘토로 불렸던 신평 변호사는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대선 불복은 야당 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치 초년생’인 윤 대통령은 바깥의 적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까지 안고 있다”며 홍 시장과 유 전 의원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