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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바 존의 문화산책

프랑스인은 왜 연금개혁에 분노하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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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에바 존 한국 프랑스학교 사서

에바 존 한국 프랑스학교 사서

오랫동안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면 고국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단절된 느낌을 받기 쉽다. 원거리에서 미디어로 접하는 소식은 사진이든 글이든 간에 실제보다 더욱 극적으로 여겨지곤 한다. 멀다 보니 문제 자체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이는 최근에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 프랑스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언론에서 공개한 충격적인 사진 중 하나는 프랑스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이 몇 주씩 이어지면서 파리 길거리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광경이다. 시위대가 쓰레기를 태우는 장면도 있었다. 지난주에는 개선문 꼭대기에 ‘64세 절대 반대’라는 문구가 걸린 사진을 보기도 했다.

서울에서 바라본 프랑스 시위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에 반발
“민주주의에 반한다” 원성 높아
한국 연금개혁에도 시사성 커

길거리 쓰레기 더미 사진에 충격

지난달 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거리에 쌓인 쓰레기들. 프랑스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 차원에서 갖다 놓은 것이다. [AP=연합뉴스]

지난달 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거리에 쌓인 쓰레기들. 프랑스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 차원에서 갖다 놓은 것이다. [AP=연합뉴스]

최근 몇 달 동안 프랑스에서는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마크롱 정부와 이에 반대하는 대중 및 노동조합들의 갈등은 지난 몇 주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어느 쪽도 입장 철회나 협상의 기미조차 없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모든 진영에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연금개혁에 어떤 내용을 담겼기에 이토록 큰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는가. 먼저는 해당 개혁의 목표가 직업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현재의 제도를 모든 노동자에게 단일 적용되는 포인트 기반 제도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번 개혁안에서 가장 큰 반발을 일으킨 부분인데, 연금 100% 수령을 위한 기여 기간을 41.5년에서 43년으로 상향 조정할 예정이다. 또한 연금 수령이 시작되는 최소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상향하는데, 이 경우 수령액 비율이 떨어진다.

프랑스 전역에서 이 개혁안에 반발하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와 파업을 벌였다. (일부 폭력과 진압이 벌어진) 대규모 시위뿐 아니라 총파업도 여러 번 있었다. 1월 19일 이후로 11일의 파업이 있었고, 다음 파업은 4월 13일로 예정되어 있다. 그다음 날인 4월 14일이면 프랑스 헌법위원회에서 해당 법안의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현재 프랑스의 연금 제도는 심각한 예산 부족에 맞닥뜨릴 위험이 있는 만큼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 개혁안이 개인의 경력 또는 직업군에 따라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번 시위의 특이한 점은 정부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노골적인 분노가 연금 개혁안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대다수의 시위자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정부가 법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이번 개혁안은 이미 평판이 몹시 나빴기에 프랑스 정부는 헌법 제49조 3항에 의거, 국회의 표결 없이 강제로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항에 따르면 정부는 국회에서 다수의 표를 얻지 않고도 법안을 제정할 수 있다. 제49조 3항 적용 이후 내각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법안은 표결 없이 채택된다.

정부 퇴진 같은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에서 불신임 투표가 가결될 가능성은 작다. 실제로 야당에서 두 차례 불신임안을 제기했으나 두 건 모두 부결되었다. 그 사이 여러 도시에서 시민들이 이번 같은 헌법 제49조 3항의 남용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수단이라고 정당하게 항의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프랑스 역사에서 정부의 정치적 오판 또는 오만에서 비롯된 분노와 불신이 이 정도로 격렬해진 상황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정치적 대실패와 그 부산물인 집단 시위가 몹시 극심해, 지난 3월 영국 찰스 왕이 프랑스 방문을 취소했을 정도였다.

4년 전 ‘노란 조끼 운동’ 연상

여러 전문가에 따르면 연금개혁 이전부터 사회 운동의 원인이 있었다. 일례로 물가 상승으로 인한 유류세 인상도 대중의 분노를 촉발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 4년 전에 ‘노란 조끼 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연금 개혁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지난 3월 저수지 축조 현장에서 환경운동가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폭력이 동원되면서 헌병대와 충돌을 빚어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현장은 시위자들의 방화 및 화염병 투척, 이에 대응하는 경찰의 최루 가스 살포로 전쟁터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프랑스 시위는 남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연금개혁이라는 주제는 한국과 실질적인 관련이 있다. 사회가 급속도로 고령화하는 만큼 연금개혁은 한국에서도 시급한 사안이다. 현재 60세로 설정된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고 국회에서는 연금개혁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프로젝트를 평화롭게 성사시키려면 한국 정부 역시 대중을 충분히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에바 존 한국 프랑스학교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