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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 신카이 마코토, '세계'와 '애도'로 전세계 관객 사로잡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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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중 한 장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사진 미디어캐슬

'스즈메의 문단속' 중 한 장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사진 미디어캐슬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이 지난 주말 43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질주를 하고 있다. 이 추세라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444만 관객)를 추월하고, 한국 개봉 일본 영화 흥행 1위 자리에 등극할 전망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한국 개봉 일본 영화 흥행 1위 유력 #신카이 마코토 재난3부작 마지막...일본, 중국서도 흥행 #동일본 대지진 계기로 시야 넓어진 신카이 감독의 성장

'스즈메'는 '너의 이름은.'(2017, 381만 관객), '날씨의 아이'(2019, 74만 관객)에 이은 재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영화는 앞의 두 작품에 이어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모았으며, 중국에선 2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이 영화로 신카이 감독은 당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의 위상 뿐 아니라, 전세계적 팬덤을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신카이의 작품에 관객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세계'를 하나의 키워드로 꼽을 수 있다. 그에게 세계는 영화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프레임이다. 두 세계가 충돌하거나, 숨겨져 있던 세계가 드러나거나, 각자의 세계에 속한 두 사람이 공감을 이룸으로써 그의 드라마는 시작되고 완성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지난달 8일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열린 '스즈메의 문단속'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지난달 8일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열린 '스즈메의 문단속'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너의 이름은.’의 모티브가 된 CF ‘크로스로드’(2014)에서 신카이는 전혀 만날 일이 없는 두 사람이 드디어 만나게 되는 과정을 2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낸다. 서로 다른 세상에 속한 남녀의 조우라는 테마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첫 작품은 ‘별의 목소리’(2002)다. 지구의 소년과 먼 우주로 떠난 소녀가 휴대전화 문자로 교신한다.
문자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열다섯살 때 소녀가 보낸 문자는 소년이 스물넷 청년이 됐을 때 도착한다. ‘너의 이름은.’에선 시골에 사는 미츠하와 도쿄에 사는 타키가 3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몸이 바뀐다. ‘초속 5센티미터’(2007)와 ‘언어의 정원’(2013) 또한 로맨스를 다루는데, 남녀가 속한 세계가 다름으로 인해 생겨나는 관계의 불가능을 보여준다.
신카이는 종종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시작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인데 이 영화엔 미스테리한 거대한 탑이 등장한다. ‘별을 쫓는 아이’(2011)엔 전설의 도시 아가르타가 등장하는데, 그곳에선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다. ‘날씨의 아이’엔 구름 속에 존재하는 물의 생태계가 등장하며, ‘스즈메’엔 재난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붉은 기운 ‘미미즈’와 그것을 막기 위해 애쓰는 ‘토지시’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들은 숨겨져 있기에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신카이의 애니메이션 속에선 판타지의 공간이 되어 현실과 충돌한다. 이렇게 보면 '신카이 월드'는 20여 년 전부터 테마나 모티브의 변화 없이, 반복과 변주를 통해 만들어진 비슷한 작품들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빗방울 하나, 작은 빛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움직임과 질감을 담아내는 비주얼은 실사보다 더 섬세하게 현실의 디테일을 표현하는데, 이런 작화 방식은 신카이 월드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다.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한 감정적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재난영화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최근 세 편의 영화는 이전과는 다른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실패한 로맨스, 어긋난 관계에서 비롯되는 아련한 감성을 섬세하게 그려왔던 신카이의 시야가 넓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이라 했던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처럼 그 또한 인류사적 비극을 목도한 뒤 예술가적 책무에 눈을 뜨고, 거대 재난이 황폐화시킨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작품에 담기 시작했다.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시간을 뛰어넘어서라도 재난을 막으려는 두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사진 미디어캐슬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시간을 뛰어넘어서라도 재난을 막으려는 두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사진 미디어캐슬

그 시작인 ‘너의 이름은.’은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메타포(은유)다. 시간을 뛰어넘어서라도 어떻게든 재난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하는 두 주인공의 강한 의지에 전세계가 호응했다. 특히 한국 관객들이 크게 공감한 이유는 신카이 감독이 직접 밝혔듯 세월호 사건과의 접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란 대사는 그가 세월호 사건에 영향 받아 집어넣은 것이었다.
‘날씨의 아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인공인 가출소년 호다카는 재난이 다시 시작되더라도 사랑하는 소녀 히나와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소중한 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신, 재난 상황을 감내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날씨의 아이'의 한 장면.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에서 가출소년 호다카가 하늘을 맑게 하는 소녀 히나를 만난 뒤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미디어캐슬

'날씨의 아이'의 한 장면. 비가 그치지 않는 도쿄에서 가출소년 호다카가 하늘을 맑게 하는 소녀 히나를 만난 뒤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미디어캐슬

그리고 ‘스즈메’는 ‘너의 이름은.’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동일본 대지진이란 역사적 사건에 접근해 집단적 트라우마를 어루만진다. 재난으로 엄마를 잃은 17세 소녀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지진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결국 어릴 적 자신과 만나 그 아이를 위로한다. 고된 여정을 끝내고 한층 성장한 스즈메를 통해 감독은 비극에 대한 공감과 극복의 의지, 그럼으로써 성장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려냈다.

'스즈메의 문단속' 중 한 장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사진 미디어캐슬

'스즈메의 문단속' 중 한 장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사진 미디어캐슬

이 영화가 재난 3부작의 끝맺음으로서 의미 있었던 점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동일본 대지진과 그 폐허의 현장을 끄집어내고 치유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끔찍했던 재난을 외면하기만 하고 대면하지 않으면 결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다"면서. 이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음에도 너무 빨리 망각된 비극적 과거에 대한 애도의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대재난은 특정 지역 만의 문제는 아니다. 5만여명이 사망한 튀르키예 지진, 전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후 재난 등 누구도 재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그로 인한 상실감은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감정이다. 그렇기에 신카이 감독의 최근작들이 전세계 관객들에게 긴 여운과 함께 강한 정서적 울림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결코 쉽지 않은 테마를 긴 세월 동안 끈기 있게 붙잡고 파고든 그의 노력이 흥행 성적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이유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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