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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과 지키겠습니다"…젊은 의사들의 글, 뭉클한 댓글 몰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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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어린이들이 가장 큰 선생님이었기에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표한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출입구에 지난 2월 게시된 실외용 배너 하나가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환자와 보호자, 직원들께 드리는 감사의 글’이란 제목의 글은 올해 전문의 자격을 딴 14명의 서울대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썼다. 새내기 ‘의사 선생님’들이 환자인 어린이들을 ‘가장 큰 선생님’이라고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들은 글에서 “어린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보호자분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고민하고 노력하는 동안, 기쁨과 슬픔의 의미를 깊게 배웠다”고 적었다. 이어 “소아청소년과 위기라는 말이 쏟아지고 있지만, 늘 어린이 곁을 지키고 돌보며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배운 것을 나누는 일에도 힘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출입구에 세워진 배너.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출입구에 세워진 배너.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이 배너에 ‘댓글 릴레이’가 펼쳐졌다. ‘서울대에서 치료받는 아기의 엄마’라고 소개한 한 보호자는 글씨가 빼곡한 쪽지를 배너 위에 의료용 반창고로 붙였다. 그는 “위기 속에서도 기꺼이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해주시고 아이들을 성심껏 봐주시는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보통의 사명감으로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보호자로서 선생님들 노고를 이해하며 치료할 때 성심껏 돕도록 하겠다”고 적었다.

의사와 환자 가족 모두 언급한 ‘위기’는 최근 저출산 흐름과 낮은 의료수가 등으로 고사 위기를 겪는 소아청소년 의료 현실을 말한다. 올해 전국 소아과 수련병원의 전공의 모집률은 15.9%로 최저치를 찍었다. 빅5 병원 중 1차 모집에서 정원을 다 채운 곳은 서울아산병원뿐이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배너 작성자 신백섭 전임의(임상강사)는 “소아과 위기라는 말에 불안을 느낄 보호자들께 무언가 말씀드리고 싶었다. (장문의 답장은) 전공의 못지않게 힘든 전임의 생활에 한 줄기 빛이었다”고 했다.

배너에 보호자가 의료용 반창고로 붙인 메모.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배너에 보호자가 의료용 반창고로 붙인 메모.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보호자가 쓴 메모에 소아청소년과 교수진도 반응했다. 신충호 소아청소년과 과장은 67명 교수진을 대표해 “최선을 다해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게 가정으로 돌려보내 드리겠다. 정성을 다해 전공의, 전임의들을 육성하겠다”고 썼다. 신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려운 와중에도 열심히 해주는 전공의들에게 감사했고 이런 사정을 알아주는 보호자께도 고마웠다”고 말했다.

지난 6일엔 최은화 어린이병원장이 “모든 의료진을 대신해 진심을 남긴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항상 연구하고 노력해 ‘최고의 진료’를 제공하도록 많이 응원해달라”고 적은 메모를 배너에 붙였다. 최 병원장은 “자칫 작위적이라는 오해를 받을까 싶어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우리 병원 아이들 상당수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오는 중증의 환자다. 절박한 심정으로 찾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손글씨로 격려와 감사를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배너에 붙은 릴레이 형태 편지들.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배너에 붙은 릴레이 형태 편지들. 사진 서울대병원 제공.

신백섭 전임의는 “어린이들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아이들만 생각하고 진료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의사 후배들에겐 “아이 한 명을 살리는 건 아이에게 80년을 선물해주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보람찬 일이니 뜻이 있다면 의지를 갖고 같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충호 교수는 “변화에는 동력이 필요한데 분노와 속상함으로 시작해선 잘 바뀌지 않는다”며 “감사의 마음에서 시작해 끝까지 이어진다면 어린이들이 건강한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어린이병원 모습. 뉴스1.

서울 종로구 서울대어린이병원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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