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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너무 그리웠다”…놀림 받던 ‘쌀소년’의 캐나다판 ‘미나리’

중앙일보

입력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 새로운 삶을 찾아 캐나다로 이주한 싱글맘 소영과 아들 동현의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 새로운 삶을 찾아 캐나다로 이주한 싱글맘 소영과 아들 동현의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판씨네마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지극히 단순명료한 문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집’을 물리적인 주거 공간이 아닌 ‘내가 진짜 나답게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정체성이 비롯된 곳’ 등으로 의미를 넓히는 순간 여러 해석이 가능한,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 된다. 그런 의미의 ‘집’을 누군가는 쉽게 특정할 수 있을 테지만, 과연 나의 집이 어디인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19일 개봉하는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Riceboy Sleeps)’는 바로 이런 진정한 집을 찾아 헤매는 이민자 모자(母子)의 여정을 그린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해 자란 한국계 이민 2세 앤소니 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제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의 플랫폼심사위원상 등 세계적으로 27관왕을 달성한 화제작이다. 미국에 정착하려는 한국인 가족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2021)를 잇는 또 하나의 한인 이민자 서사라는 점에서 ‘제2의 미나리’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대를 16mm 필름 촬영으로 담아내 마치 빛바랜 부모님의 사진첩을 넘겨보는 듯 아스라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1990년대를 16mm 필름 촬영으로 담아내 마치 빛바랜 부모님의 사진첩을 넘겨보는 듯 아스라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는 1990년, 남편과 사별한 뒤 어린 아들과 둘만 남은 소영(최승윤)의 사정을 압축해 들려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새 출발을 위해 한국을 떠난 소영과 아들 동현(황도현)에게 캐나다 생활은 대다수 이주민이 겪는 인종차별과 무시, 배제의 연속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소영은 백인 직원들의 성희롱에 직면하고, 동현은 등교 첫날 점심으로 싸간 김밥 때문에 ‘라이스보이’, 즉 ‘쌀소년’이란 별명을 얻으며 친구들의 따돌림에 시달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런 차별에 움츠러드는 대신, 서로에게 의지하며 고단한 이민 생활을 버텨나간다.

어느덧 9년 뒤, 10대 청소년이 된 동현(이든 황)은 컬러 렌즈를 끼고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모습이다. 엄마와는 멀어지고 또래 백인 친구들과 외모로나 내면으로나 더 가까워진 듯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엔 기억나지 않는 한국과 아빠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하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얘기하길 한사코 꺼리던 소영은 자신이 곧 동현을 홀로 두게 될 처지임을 깨닫고, 비로소 아들과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한국행 여행에 나선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엄마와 단 둘이 캐나다로 이주한 아들 동현(황도현)은 학교에서 '라이스보이', 즉 '쌀소년'이라 놀림받으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엄마와 단 둘이 캐나다로 이주한 아들 동현(황도현)은 학교에서 '라이스보이', 즉 '쌀소년'이라 놀림받으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10대가 된 동현(이든 황)은 컬러 렌즈와 염색으로 백인 친구들 사이에 녹아든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한국과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10대가 된 동현(이든 황)은 컬러 렌즈와 염색으로 백인 친구들 사이에 녹아든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한국과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사진 판씨네마

이민 2세들이 이주 초반에 겪는 고난을 나열한 듯한 영화 초반은 다소 기시감이 들지만, 대부분 실제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디테일이 남다르다. 여덟 살 무렵이던 1994년 가족들과 캐나다로 건너가 성장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늘 너무 그리웠다”는 앤소니 심 감독은 이번 영화의 연출은 물론 각본·제작·편집에 배우로까지 참여하며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녹여냈다. 친구들이 괴롭히면 ‘두 유 노 태권도?’라고 반격하고 한 대 세게 때리라고 일러주는 엄마의 모습 등 영화 속 크고 작은 사건들 모두 그의 실제 경험에서 나왔다.

이민자 서사여서 비슷한 경험이 없는 관객은 공감이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누구에게나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인 집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혀 공감대를 자아낸다. 특히 16mm 필름, 1.33:1 비율 화면에 1990년대를 담아낸 영상미는 마치 빛바랜 부모님의 사진첩을 넘겨보는 듯 아득하고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사진 판씨네마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사진 판씨네마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배경이 바뀌는 지점에서 화면이 가로로 넓어지면서 자연 다큐의 한 장면처럼 한국 시골의 경관이 펼쳐지는데, 이제야 진정한 집에 당도한 듯 편안하고 후련한 소영과 동현의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감독은 이런 연출에 대해 “캐나다는 아주 큰 나라지만 그 안에 살던 인물들이 힘든 삶 때문에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좁게 느꼈다면,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정신적으로 훨씬 넓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감독이 “강하면서도 헌신적인 한국 어머니들에 대한 헌사”라고도 표현했듯,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숱한 삶의 곡절에도 꿋꿋이 삶을 이어가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 소영을 연기한 배우 최승윤은 다섯 살 때 발레를 시작한 댄서이자 무용가로, 친구들과 찍은 웹드라마 한 편, 직접 연출·출연한 다큐픽션(‘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에서 카메라 앞에 선 것을 빼면 정식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신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다큐에서 그를 눈여겨본 캐스팅 감독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보게 된 그는 다섯 차례 화상 면접을 거쳐 소영 역에 확정됐다.

“우연에 우연의 연속으로 연기를 하게 됐다”는 최승윤은 처음 덜컥 주연을 맡은 이 영화로 수많은 국제영화제에 참석하고, 제19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등에선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만난 그는 영화가 해외에서 이토록 큰 인정을 받은 데 대해 “이민 얘기이기에 앞서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다. 엄마 없는 사람은 없으니 그런 점에 많이 공감해주신 것 같다”며 “누구에게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중요하지 않나. 동현뿐 아니라 소영에게도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버리고 떠나왔던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 “영화가 ‘제2의 미나리’라고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미나리’와 소재는 같을지라도 또 다른 이야기”라며 “가랑비에 옷 젖듯 감정과 정서가 스며드는 한 편의 시 같은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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