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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희생 우려했지만…'조력존엄사법' 26주년 그 곳의 반전

중앙일보

입력

지난 2018년 5월 10일(현지시간)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사망 당시 104세)이 하루 전날인 9일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는 호주 대신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안락사를 요구할 수 있는 스위스로 건너가 삶을 종결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2018년 5월 10일(현지시간)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통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사망 당시 104세)이 하루 전날인 9일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는 호주 대신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안락사를 요구할 수 있는 스위스로 건너가 삶을 종결했다. [AFP=연합뉴스]

국내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4년만인 지난해 6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은 연명의료결정법 일부 개정안(이하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하면서 안락사 허용에 대한 찬반 논란에 불을 댕겼다. 현재 한국에선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ECLS)ㆍ수혈ㆍ혈압상승제 투여 7가지 연명의료를 거부할 권리만 있다.

안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연명의료 중단을 건너뛰고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들 가운데 본인이 희망할 경우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소위 ‘소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자는 취지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8명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도입이 필요하단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종교계와 의료계는 “자살을 부추길 수 있고, 사회ㆍ경제적 약자가 존엄사란 이름으로 죽음을 강요당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조력자살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선 어떤 결과가 나오고 있을까. 26년 전인 1997년 미국 최초로 ‘조력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 DWDA)’을 도입한 미국 오리건주의 2022년 조력자살 보고서를 통해 실제 현황을 분석했다.

조력자살한 환자 96%가 백인

오리건주 보건당국이 지난 달 8일 발표한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력자살한 환자 278명 중 백인 비율이 96%를 차지했다.

오리건주 보건당국이 지난 달 8일 발표한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력자살한 환자 278명 중 백인 비율이 96%를 차지했다.

우선 오리건주의 경우 18세 이상 성인이면서 6개월 미만 말기 시한부 환자인 이들 중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의사에게 존엄사를 요청할 경우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환자의 정확한 의사 확인을 위해 구두로 2번, 서면으로 2번 요청해야 하며 2명 이상의 의사에게 진료 및 상담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가 희생될 수 있다는 우려와 달리 2022년 통계를 보면 백인, 그리고 고학력자일수록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았다. 작년 한 해 오리건주에서 조력자살한 환자 278명 중 백인이 96%(267명)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아시안이 1.8%(5명)로 뒤를 이었고, 아메리칸 인디언과 히스패닉이 각각 0.7%(2명),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0.4%(1명)로 조사됐다.

일각에선 오리건주의 경우 백인 비율이 80%를 넘어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백인 비율이 적은 캘리포니아(라틴계 39%, 백인 35%, 아시아계 15%, 흑인 5%)의 2021년 조력자살 보고서에서도 백인이 85.6%로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아시안은 7%, 히스패닉 5.1%, 흑인은 0.8% 수준이었다.

오리건주에서 조력자살을 선택한 278명의 교육수준을 보면 학사(Bachelor's degree) 이상 학력을 가진 이가 49%(136명)로 절반을 차지했다. 8학년(한국 기준 중학교) 이하는 1.8%(5명), 9~12학년(고등학교)은 2.9%(8명)로 저학력자는 소수였다. 성별에선 남성이 138명, 여성이 140명으로 차이가 거의 없었다. 평균 나이는 75세였으며 65세 이상이 전체의 84.5%를 차지했다. 질병 분류에선 암 환자가 64%로 가장 많았고, 심장·순환계 질환 11.5%, 호흡기 질환 9.7%, 신경계 질환 9.7% 순이었다.

26년 흘렀어도 찬반 갈등 여전…거주요건 폐기 두고 재점화

결과를 둘러싼 해석은 미국 내에서도 분분하다. 조력자살을 찬성하는 측에선 “사회적 타살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충분히 마련돼 있어 환자들은 오롯이 존엄사 권리 실현을 위해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환자들이 의료비 부담이나 말기 치료 인프라 부족 때문에 조력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 2022년 기준 조력자살 사망자의 75.5%가 의료보험이 있었고, 91.4%가 호스피스에 등록돼 있었다.

반면 반대 측에선 ‘시한부 판정의 모호성’과 환자 정신 감정 과정 부족, 의사와의 커뮤니케이션 부족 등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조력자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반박한다. 최근 5년간 오리건주에서 조력자살한 환자 수는 ▶2018년 178명 ▶2019년 191명 ▶2020년 259명 ▶2021년 255명 ▶2022년 287명으로 증가 추세다.

조력존엄사법 시행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찬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거주요건 폐기를 두고 또다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그동안은 오리건주에 거주하는 사람이어야 조력자살을 할 수 있었는데 주 당국이 지난해 3월부터 법률상에 명시된 거주요건을 폐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찬성 측은 “환자들의 죽을 권리는 동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반대 측은 “죽음 관광(death tourism)을 부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내 의사조력자살 도입 논란과 관련 허대석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이행 시기를 임종기에서 말기로 앞당기고, 대상 환자를 지속적인 식물상태 환자, 중증 치매 환자 등으로 넓히는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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