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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면 삼켜라? 이곳이 뚫렸다…구멍난 北수칙, 지령문 쏟아내

중앙일보

입력

“들키면 USB를 부수고 삼켜라”
경남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간첩단 ‘자주통일민중전위(자통)’ 회원들이 평소 주고받은 말이다. 방첩당국의 적발을 피하기 위한 기본적인 보안 수칙이다. 북한과 주고받은 보고문·지령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북한 정보기관 체계도.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북한 정보기관 체계도.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방첩당국이 최근 기소한 자통과 ‘제주 ㅎㄱㅎ’ 뿐만 아니라 현재 수사 중인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의 간첩 의혹 사건에서도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170여건의 대북 통신문건이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선 대부분의 피의자가 진술 자체를 거부하면서 일체의 증거를 부정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지령문·보고문이 유·무죄를 가르고 형량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통의 대북 통신문건은 압수한 PC의 포렌식 과정에서 발견됐다. 총책 격인 황모(60)씨가 북한 문화교류국에서 받은 지령문은 PC나 USB 같은 이동식 저장 장치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방첩당국이 압수한 PC의 ‘임시파일’에 통신문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령문이나 보고문에 담긴 내용을 복사해 옮기는 과정에서 생성된 임시파일이 포렌식 끝에 복구된 것이다.

구멍 뚫린 보안이 수사의 활로를 열어주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 출신의 석모 씨 등 4명 관련 수사에서는 120여건의 통신문건이 확보됐다. 방첩당국은 지령문 90여 건과 보고문 30여 건을 토대로 수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에도 대북 통신문건이 영향을 미쳤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지난 1월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 하면서 대북 통신문건이 담긴 PC를 확보했다. 해당 PC에 담긴 통신문건은 암호화된 파일이 아니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지령문 삭제는 북한이 반복해서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간첩 혐의 피의자들이 준수하는 기본 수칙”이라며 “수사하는 입장에서는 행운이지만 흔치 않은 경우”라고 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암호키를 확보해 암호화된 지령문과 보고문을 해독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5일 기소된 제주 ㅎㄱㅎ 사건에서는 방첩당국이 압수수색 과정에서 암호키가 담긴 이동식 저장 장치를 확보했다. 암호키는 북한이 외국계 e메일과 클라우드를 통해 보낸 위장 파일을 지시문으로 출력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암호화 기술 진화로 슈퍼컴퓨터로도 암호화 파일 해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국정원이 암호키를 습득하면서 14건의 보고문과 13건의 지령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과거 청주 간첩단 사건에서는 방첩당국이 이불 속에 숨긴 암호키를 압수하면서 지령문을 대거 확보했다.

수사 단계에서 드러난 대북 통신문은 재판 단계에서 증거 효력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이 치열하게 다툴 전망이다. 통상 간첩 의혹을 받는 피의자들이 재판에서 증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할 경우, 검찰은 확보한 파일의 동일성과 무결성을 입증해야 한다. 방첩당국 관계자는 “압수수색 단계부터 재판을 염두에 두고 절차에 어긋나지 않도록 증거물을 확보하고, 파일의 동일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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