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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료 인상 막히자, 채권 발행 급증…한전발 금융 불안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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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 뉴스1

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본부. 뉴스1

돈줄이 마른 한국전력이 채권(한전채) 발행을 늘리자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치권에서 전기요금 인상을 틀어막은 데 따른 부정적 나비효과다.

정부와 국민의힘이 지난달 31일 당정협의회에서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보류하자 요금 인상을 기대한 한전은 난처해졌다. 전기를 팔아 원가의 70%밖에 회수하지 못하는 한전은 지난해 32조60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10조 원 넘는 적자를 예상한다. 한전은 한 달에 네 차례에 걸쳐 발전사에 전기를 구매하고 그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돈줄이 마른 한전이 대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채권을 발행하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이다. 통상 은행 대출금리가 회사채 발행금리보다 높아 한전이 필요한 돈을 모두 은행 대출로 충당하긴 부담스럽다. 결국 남은 건 한전채 발행이다.

연도별 한전 영업손익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전,전력거래소]

연도별 한전 영업손익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전,전력거래소]

5일 한전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한전채 발행 잔액은 68조300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 잔액(39조6200억원) 대비 72% 늘었다. 올해 들어서만 1월 3조2100억원, 2월 2조7100억원, 3월 2조900억원 규모 한전채를 발행했다. 1분기 기준 발행액(8조100억원)이 1년 전 발행액(6조8700억원) 대비 17% 늘었다. 1월 발행액은 역대 최대 규모였던 지난해 11월(4조300억원), 12월(3조8700억원)에 이어 세 번째다.

마침 ‘멍석’도 깔렸다. 국회는 지난해 말 한전법을 개정해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을 더한 규모의 기존 2배에서 5배로 올렸다. 경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긴급 상황에선 산업부 장관의 승인으로 한도를 6배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김상만 하나증권 채권팀장은 “전기요금을 추가 인상하지 않고, 매달 3조원씩 한전채를 발행한다면 (일부 채권의 만기가 도래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올해 한전채 잔액이 90조원을 돌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한전채가 금융시장 및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한전채는 일반 회사채와 달리 정부가 지급을 보증한다. 신용등급은 초우량 등급인 트리플A(AAA)다. 한전채가 ‘국민채(債)’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행한 채권 물량의 4.8%. 회사채 발행량의 45.6%가 한전채였다.

우량주인데 최근엔 금리까지 높은 수준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5일 기준 한전채(3년물) 금리는 3.803%다. 금리가 ‘정점’을 찍은 지난해 11월(5.99%)보다는 떨어졌지만 2021년까지 장기간 1%대 금리를 유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높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금리가 높고 신용등급도 최상위인 한전채로 투자 수요가 쏠리면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A급 이하 회사채는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한다. 해당 회사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글로벌 은행 위기 이후 채권시장이 냉각된 상황에서 한전채로 ‘머니 무브(money move)’가 일어나면 일반 회사채가 외면받는 ‘구축효과’가 심화할 수 있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투자자 입장에서 한전채가 다른 회사채나 카드채와 신용도·금리가 비슷하다면 (한전채를) 살 수밖에 없다”며 “결과적으로 한전의 대규모 적자가 경제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 직후 회사채 투자 심리가 급격히 위축하자 신용도가 높은 한전채·은행채로 수요가 급격히 몰렸다. 일반 기업은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자금난을 겪었다. 한전보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금리에 채권을 발행해야 했다. 시중 자금이 한전채로 몰리면 은행은 수신(예·적금)금리를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수신금리가 오르면 조달비용이 올라 여신(대출)금리가 따라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한전으로서는 한전채 발행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에 빠졌다”며 “적정 수준의 한전채 발행을 유도해 금융시장 혼란을 막되 결국 전기요금을 인상해 적자를 줄일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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