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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실종됐다"…양곡법 野 입법독주에 尹 거부권, 악순환 시작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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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과반 의석으로 입법권을 꽉 쥔 야당의 충돌이 현실화됐다. 이재명 대표의 이른바 ‘1호 민생 법안’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시키자,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대통령 고유 권한인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로 맞서면서다. 향후 방송법 의료법 등도 야당이 강행을 예고한 터라 ‘행정 대 입법’의 대결 국면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4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의결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14회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의결했다. 대통령실

이날 오전 용산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윤 대통령은 개의 의사봉을 두드리자마자 양곡법 개정안부터 겨냥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이번 법안의 부작용에 대해 국회에 지속적으로 설명해 왔습니다만, 제대로 된 토론 없이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169석의 민주당은 상임위 단독의결→본회의 직회부를 거쳐 지난달 23일 본회의에서 양곡법 개정안을 일방 처리했다. 윤 대통령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직격했다. 그러면서 “법안 처리 후 40개 농업인 단체가 양곡법 개정안의 전면 재논의를 요구했다. 관계부처와 여당도 현장 목소리를 경청하고 검토해서 제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했다”고 덧붙였다.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에선 양곡관리법 개정안 공포안 부결→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요구안 심의·의결→윤 대통령 재가까지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거부권 행사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이자, 2016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상시청문회법) 거부권 이후 7년 만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거부권 행사 직후 민주당은 “이 정권은 끝났다”(정청래 최고위원) 같은 격한 반발을 쏟아냈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규탄 시위도 벌였다. 그러자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2019년 쌀 의무매입법을 여당인 민주당 의원이 발의하자 당시 문재인 정부가 반대했다. 문재인 정부는 왜 지금 우리처럼 이 법안을 반대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윤 대통령은 그간 양곡법 개정을 두고 “농민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2022년 10월 20일), “무제한 수매는 결코 우리 농업에 바람직하지 않다”(2023년 1월 4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민생 1호 법안’으로 규정한 민주당은 지난해 10월 농해수위 단독의결, 지난해 12월 본회의 직회부 의결, 올해 3월 23일 본회의 처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급격한 쌀값 하락에 따른 농민 피해를 막기 위해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게 주된 명분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주장과 달리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10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돼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한다면 2030년에는 1조4000억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돼 재정 부담 증가가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대표적이다. 이런 의견을 묵살한 채 거야(巨野)가 입법독주를 감행하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불가피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대화와 타협이 없는 정치 실종 상태"(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우려했다. 집권여당은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만 할 뿐 제대로 타협과 조율을 이끌지 못했다. 익명을 원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설령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한 협상용이라고 해도, 집권여당이 최종적 수단인 대통령 거부권을 너무 쉽게 꺼내 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일각에선 야당 지도부와 한 차례도 만나지 않는 등 윤 대통령의 소통이 아쉽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결국 국정의 책임은 대통령”이라며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문제는 앞으로다. 당장,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도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권을 행사하면 입법에 또 도전하겠다”(3월 22일 김성환 정책위의장)고 공언하고 있다. 실제 양곡관리법 외에 여권이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내비친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개정안과 방송법 등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의석수를 앞세워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또한 “거론되는 법안 중 간호법 외에는 전부 거부권을 행사할 공산이 높다”고 전했다. 결국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강대강’ 대결이 무한 반복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런 강대 강 대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여야 모두 실보다 득이 크다는 판단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양곡법외에도 노란봉투법·방송법 등 민주당이 처리를 벼르는 것들은 이해관계자들이 강하게 충돌하는 법안”이라며 “윤 대통령과 민주당 양쪽 다 양보할 수 없는 이슈로, 결국 총선 전까지는 계속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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