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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기습 석유 감산에…미국, 부글부글해도 꾹 참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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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AFP=연합뉴스

조 바이든(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AFP=연합뉴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대규모 추가 감산을 기습 발표한 것에 대해 미국이 대응 수위 조절에 나섰다. 백악관 측은 “감산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이번 감산을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를 “80년 전략 파트너”로 칭하며 협력을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대규모 감산 당시 사우디를 향해 “후과가 있을 것”이라며 엄포를 놨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다. 현실적으로 감산에 대응할 수단이 별로 없는 데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중동 역학관계 변화를 의식한 전략적 행보란 분석이 나온다.

“사우디는 80년 전략 파트너” 강조한 백악관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3일(현지시간)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전날 OPEC+의 추가 감산에 대해 “시장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감산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감산을 벌인 OPEC+를 비판하기보다 미국 내 가격 안정에 방점을 뒀다. 커비 조정관은 “생산량이 아니라 가격에 집중하고 있다”며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미국 소비자를 위해 유가를 낮추고 석유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OPEC 본부 건물의 모습.AP=연합뉴스

지난해 3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OPEC 본부 건물의 모습.AP=연합뉴스

이번 감산을 이끈 사우디에 대해선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커비 조정관은 “지난 80년간 그랬던 것처럼 사우디는 여전히 전략적인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사우디가 서로의 말과 행동에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파트너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우리는 함께 계속 협력해야 할 많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협력 사례론 예멘 휴전, 이스라엘 문제, 우크라이나에 대한 사우디의 인도적 지원 등을 거론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지난해 10월 OPEC+가 하루 200만 배럴을 감산하자 백악관이 “근시안적 결정” “후과가 있을 것”이라며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과는 차이가 큰 발언이다. 이에 대해 커비 조정관은 “외교 정책 목표와 국가안보 이익에 부합하는지 지속해 살펴보지 않는 양자 관계는 없다”고 말했다. 관계 재검토 발언은 통상적 차원의 외교 행동이라는 얘기다. 미 CNN방송은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를 규제하겠다던 약속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대응수단 없어 속 끓이는 미국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시민이 승용차에 주유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시민이 승용차에 주유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이 사우디의 기습적인 감산에도 격앙된 반응을 최대한 자제하는 건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당장 가능한 건 전략비축유 방출이다. 하지만 미국은 현재 전체 용량의 절반 수준인 3억7100만 배럴만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는 유가를 안정시키느라 약 1억8000만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방출했기 때문이다. 비축유를 방출하더라도 주요 산유국들의 생산량 조절을 벌이면 원유 가격은 잡지 못하고 전략비축유만 동 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미 정부가 OPEC+ 국가들을 미 연방법원에 제소할 수 있는 ‘석유생산수출담합금지’(NOPEC) 법안 제정 움직임이 본격화될 수는 있다. 법안은 지난해 상원 법사위를 통과했다. 상·하원 본회의를 거쳐 대통령 서명을 받으면 발효된다. 하지만 사우디는 줄곧 NOPEC이 통과되면 미국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석유를 거래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 행정부는 외교관계와 국방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OPEC+에 대한 소송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미 셰일업체들의 증산을 통한 맞대응도 쉽지 않다.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유가가 배럴당 60달러에서 100달러를 넘을 정도로 변동성이 커지면서 셰일업체들은 장기적인 계획이 요구되는 증산에 꺼려왔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 치솟았을 때 바이든 대통령이 나서서 증산을 요구했지만, 셰일업체는 이를 거부했다”며 “이번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국내 석유산업을 강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휘발유와 디젤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역효과가 우려돼 실제 시행하지는 않았다.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로 원유 수요가 약화하면서 원유가격이 폭등하지 않아 미국의 피해도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데이비드 골드윈 전 백악관 에너지 특사는 “OPEC은 원유 수요 증가 둔화를 예상하고 감산한 것”이라며 “바이든 행정부의 대응은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중동 밀착 의식한 행동?

지난달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무사드 빈 무함마드 알아이반(왼쪽) 사우디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리 샴카니(오른쪽)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의장, 왕이(가운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회동을 갖고 사우디와 이란의 양국 관계 정상화에 공동으로 합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무사드 빈 무함마드 알아이반(왼쪽) 사우디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리 샴카니(오른쪽)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의장, 왕이(가운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회동을 갖고 사우디와 이란의 양국 관계 정상화에 공동으로 합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와 별개로 미국이 사우디에 보인 반응은 중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역학관계 변화를 의식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NYT는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사우디와 이란과의 화해를 중국이 중재하는 등 중국이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는 미국을 의식하지 않고 서방 제재를 받는 시리아·이란과 관계 회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아랍연맹(AL) 정상회담 개최국인 사우디는 수주 안에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회담에 초청할 전망이다. 중국의 중재로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이란과는 조만간 외무장관 회담을 갖고, 정상 회담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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