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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1377년의 ‘직지(直指)’, 2023년의 ‘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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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고려 말 제작된 『직지(直指)』 금속활자본.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줄여서『직지』 『직지심체요절』이라 부른다. [중앙포토]

고려 말 제작된 『직지(直指)』 금속활자본.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줄여서『직지』 『직지심체요절』이라 부른다. [중앙포토]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으며 금년의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에는 송곳 세울 땅이라도 있었지만 금년에는 세울 송곳조차 없구나.”
 중국 당나라 말기 향엄 스님의 말이다. 옛 인도·중국의 조사(祖師) 165명의 깨달음을 간추린 『직지(直指)』의 한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은 개인과 국가의 최대 난제다. 깊은 산속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큰스님도 가난과 직면했던 모양이다. 산 넘어 산 같은 악재에 휩싸인 오늘의 우리도 떠오른다.

최고 금속활자본 50년 만에 공개
위기의 고려 말 “자신을 직시하라”
우리 시대의 ‘가난한 정치’에 죽비

 『직지』(1377)는 한국 문화의 자존심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서양 종교혁명의 밑바탕이 된 『구텐베르크 성서』(1455)보다 78년을 앞섰다. 『직지』가 또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오는 12일부터 7월 16일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에 나온다. 『직지』가 일반 관객과 만나는 건 50년 만이다. 1973년 역시 같은 곳에서 열린 ‘동양의 보물’ 전시 이후 실물 공개는 처음이다.

최고 금속활자본 50년 만에 공개 #위기의 고려 말 “자신을 직시하라” #우리 시대의 ‘가난한 정치’에 죽비

 알려진 대로 『직지』는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사들여 자국으로 가져갔다. 이후 경매를 거쳐 1950년 프랑스 도서관에 기증됐다. 책 표지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1377’이란 플랑시의 친필이 남아 있다. 플랑시가 구매 당시 『직지』의 가치를 알아본 셈이다.

 플랑시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직지』를 처음 서구에 소개했다. 고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02년 태극훈장도 수여했다. 기증 이후 도서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직지』를 박병선(1929~2011) 박사가 다시 찾아냈고, 1972년 제1회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 국영 1TV는 “금속활자의 영광을 이제 동양의 한 나라에 돌려줘야 합니다”라고 보도했다.

 『직지』는 한국인의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한다. 이른바 K컬처의 뿌리쯤 된다. 하지만 2023년 오늘에도 많은 숙제를 던져준다. 우선 문화재 기원국(한국)과 소장국(프랑스)의 문제다. ‘약탈 문화재’가 아닌 만큼 양국의 교류 및 공조가 필수적이다.
 올해 전시에 맞춰 열리는 한·불 콘퍼런스가 반가운 이유다.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공감대부터 쌓아야 한다. “한국의 소유”라며 반환을 압박할 사안이 아니다. 병인양요 때 빼앗겼다가 2011년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입법 정비가 필수적이다. 전시 목적으로 외국에서 빌려온 작품은 돌려준다는 ‘문화재 압류 면제’ 조항이 없기에 그간 수차례 국내 전시를 추진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세계문화사에 큰 획을 그은 『직지』에 대한 폭넓은 성찰도 긴요하다. 고려 선승 백운이 편찬하고, 그의 사후 제자들이 간행한 『직지』는 선불교(禪佛敎)의 요체를 압축한 책이다. 고려 말 쇠락한 귀족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불교의 초심을 되찾으려 했다. 반면에 시대는 이미 기울어졌다. 『직지』 간행 15년 뒤 유교를 받든 조선이 건국했다.

 『직지』 목판본도 기억해야 한다. 프랑스 활자본은 두 권짜리 『직지』 중 하권뿐이다. 고려시대 목판본은 대량 보급에, 활자본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이용됐다. 우리가 『직지』의 전모를 알 수 있는 건 국내 목판본(보물 지정) 덕분이다. 문화재적 가치가 활자본에 못지않다.

 『직지』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나왔다.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핵심은 주인의식이다. 언제 어디서든 당당한 자신으로 서는 길을 제시한다. 위기에서도 자신의 본체를 직시하라고 당부한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정치도, 경제도, 안보도 백척간두에 선 지금, 646년 전 『직지』가 일깨운다. 너 자신부터 바로 보라고…. 당리당략에 빠져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위정자부터 죽비를 맞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