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 참회 10년… “새 인생 찾았어요”/어느 모범수의 옥중약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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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영등포교도소의 이석룡씨/교화사업 할머니가 중매 자청/남은 형기 5년… 결혼식은 미뤄
살인죄로 10년째 복역중인 죄수가 주위의 도움으로 교도소 안에서 약혼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약속했다.
징역 15년이 확정돼 서울 영등포교도소(소장 박상정)에 수감중인 이석룡씨(37·세례명 바오로)와 약혼녀 박한순(27·서울 창신동)가 화제의 주인공.
『한순씨가 저에게는 바로 천사입니다. 새 인생을 열어주신 고마운 분들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23일 오후2시 교도소 소회의실에서 열린 약혼식에서 신부측이 해준 말쑥한 양복차림의 이씨가 금반지를 끼워주며 사랑을 약속하자 예비신부 박씨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이씨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약혼식 참석자는 신부 박씨 가족과 교도관·천주교 사목회원 및 신랑 친구인 같은방 재소자 등 40여명.
이들은 신부측이 마련해온 떡·잡채·홍어회·과일 등을 맛있게 들었다.
신랑 이씨가 뜻하지 않던 살인을 저지른 것은 80년6월.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유일한 혈육인 형과 함께 살때였다.
형수 동생인 안모씨의 목공소에서 목공으로 일하던중 안씨의 부부싸움을 말리다 모욕적인 욕설을 듣는 순간 이성을 잃고 흉기로 안씨의 2살된 아들을 찔러 숨지게 했던것.
이 사건으로 형과는 인연이 끊겼고 살인범이라는 죄책감까지 겹쳐 방황하던 이씨는 81년 교도소안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85년에는 중입 검정시험에 합격했고 86년에는 건축목공·가구제작 등 2개의 기능사 자격을 획득했다. 그동안 두차례 교도소장 표창도 받아 1급 모범수가 됐다.
이씨의 성실한 태도는 장기수 교화사업을 하던 정팔기할머니(74·세례명 안나)에게 알려져 정할머니는 이씨를 양자로 삼았다.
정할머니는 아들이 출소후 안정을 찾으려면 살붙이가 필요하다고 보고 신부감으로 박씨를 찾아냈던것.
국민학교를 나와 식당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일하던 박씨는 살인범이란 말에 질겁을 했지만 3개월을 매일같이 찾아다니며 『한번 만나보기만 해달라』는 정할머니의 간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박씨 가족들은 이씨의 심성을 알아보기 위해 본인 모르게 교도소장실에서 12명의 재소자를 한꺼번에 불러 다과회를 가졌다. 첫눈에 신랑감이 맘에든 박씨는 그후 다른 혼처를 마다하고 열심히 면회를 다니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다져 결혼을 약속했다.
교도소측도 이들의 애틋한 사랑에 감동,당초 23일 결혼식을 올리도록 허가했으나 「범죄와의 전쟁」 선포후 최근 강력·흉악범에 대한 귀휴금지 방침으로 결혼식을 미룬채 약혼식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5시 입방시간이 되어 놓기싫은 손을 놓고 돌아서는 신부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교도소측은 이씨의 귀휴와 가석방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이들의 아픈 가슴을 달래줬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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