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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이 시대의 그리운 작곡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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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잘 때도 머릿속에서 음악이 흘러가고, 숨 쉬고 있는 시간 전부 다 음악 속에 살고 있습니다. 콩나물 대가리 하나하나를 내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썼죠.”(작곡가 이영자·92).

“내가 혁명을 꿈꾼 사람은 아닌데, 음악이 사회에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냐, 변화까지는 몰라도, 모종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작곡가 이건용·76)

“음악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소리를 통해 감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고유한 것을 드러내는 게 음악이죠.”(작곡가 이돈응·68)

제32회 현대음악축제의 감흥
김정길·이강률·박은회·강석희
한국인과 함께해온 작곡가들
음악창작에 대한 끝없는 물결

제32회 현대음악축제에서 연주된 작곡가 김정길의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바이올린 김은식, 클라리넷 이창희, 피아노 이민정. [사진 한국페스티발앙상블]

제32회 현대음악축제에서 연주된 작곡가 김정길의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바이올린 김은식, 클라리넷 이창희, 피아노 이민정. [사진 한국페스티발앙상블]

한국 현대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작곡가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열정과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감상자들이 제 음악을 들음과 동시에 그 안에 담겨 있는 제 생각을 느끼고 심지어 마음이 변화되는 동화 같은 일들이 일어나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얼마나 가능할까요?”(작곡가 김택수·42)라는 희망 섞인 우려도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작곡가’는 진지하고 치열하다. 그래서 늘 한국 작곡가들의 음악이 궁금하다. 마침 지난 28일 한국페스티발 앙상블이 주최한 ‘제32회 현대음악축제’(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그들의 음악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그리운 이 시대의 작곡가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음악회에는 김정길(1933~2012), 이강률(1953~ 2004), 박은회(1930~2010), 강석희(1934~2020)의 실내악이 연주되었다.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의 박은희 대표는 한국 작곡가들의 음악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만난 작곡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모와 음악 작품에 관해 설명하며 청중의 이해를 도왔다.

‘항상 청중을 생각하는 작곡가’로 평가되는 김정길의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96)는 절제된 음악적 표현이 압축적으로 담긴 곡이었다. 한국적 음 재료를 활용하였지만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음악적 흐름 속에서 “오늘날 이 땅에 있어야 할 새로운 음악언어, 새로운 양식, 작품을 작품답게 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아 깊이 탐구”해야 한다는 그의 음악관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강률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숲속의 아침’은 두 현악기의 긴 선율선의 펼쳐짐이 교차하면서, 자연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일상에서 소재를 찾고 사물을 관찰하는 그의 음악적 감수성이 선명하게 담긴 작품이었다.

‘도라지’ ‘밀양 아리랑’ ‘새야 새야’ 등 전통 민요를 토대로 한 ‘한국 광상곡’은 경제학 교수이자 보험업계 사업가로 활동한 박온회의 곡이다. 그는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고, 그래서 음악을 전공하지 못했지만 작곡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화려한 피아노 테크닉을 대거 활용하였고, ‘밀양 아리랑’ 선율을 코믹하게 변주하는 재치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강석희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를 위한 물렝 당데’는 그가 체류했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풍경을 담은 곡으로 조성의 미묘한 변화와 현악기의 색채감이 부각되었고, 동질적 음향이 강렬한 사운드로 형상화한 부분에서는 강석희 특유의 건축적 논리성과 표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음악을 들으며 현대 작곡가 볼프강 림의 글이 떠올랐다.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조각가 자코메티가 무엇인가를 예쁘게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 나가는 것…. 이러한 창작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의 물결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음악을 창작하는 작업은 음악 예술의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 작업은 작곡가의 개인적인 예술성과 창작열의 소산이며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복합적으로 관계되는 도전적인 일이다. 음악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면, 저 멀리 떨어진 서양에서 몇백년 전 만든 음악보다, 한국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우리 시대를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직접 다가와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한국의 현대음악이 앞으로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 바라며, 또 그 울림을 느끼는 청중들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