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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아이들 대신 오른 무대, 일곱 엄마는 살아갈 힘을 얻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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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생존자 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의 일곱 엄마들이 연극에 도전하는 여정을 담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4월 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생존자 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의 일곱 엄마들이 연극에 도전하는 여정을 담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내가 쟤보다 잘하는데, 왜 맨날 주인공 안 시켜주고 이런 역할만 주지?”

1초라도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배역을 탐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배우들의 욕망이다. 그런데 그 욕망의 주체가 아이를 잃은 엄마들인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지 못한다. ‘참사 피해자’ ‘희생자 유가족’ 등의 수식어가 붙는 순간, 사회는 그들을 ‘피해자다움’이라는 색안경 뒤에서만 바라보는 탓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엄마들의 좌충우돌 연극 도전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4월 5일 개봉)은 ‘유가족은 늘 슬프고, 식음을 전폐하고, 투쟁적일 것’이라는 편견을 보란 듯이 비껴간다. 대신 무대 위에서 웃고, 노래하고, 때론 위와 같이 날 선 말을 서로 주고받기도 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더없이 진솔하게 담아냈다.

“영화에 나오는 있는 그대로의 저희를 봐줬으면 좋겠어요. ‘유가족다움’이나 ‘피해자다움’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살고 있는 이웃으로요.”(동수 엄마 김도현씨)

참사 2년여 뒤부터 지금까지, 어느덧 7년차 연극배우가 된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엄마들은 연극을 둘러싼 자신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런 바람을 전했다. 다큐의 주인공인 일곱 엄마들 중 수인 엄마(김명임), 동수 엄마(김도현), 순범 엄마(최지영),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한편의 다큐 영화로 빚어낸 이소현 감독을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을 연출한 이소현 감독(왼쪽부터)과 다큐의 주인공인 일곱 명의 엄마들 중 수인, 순범, 동수 엄마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을 연출한 이소현 감독(왼쪽부터)과 다큐의 주인공인 일곱 명의 엄마들 중 수인, 순범, 동수 엄마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재밌겠네’ 한마디에 시작된 연극…캐스팅 다툼까지

다큐는 엄마들이 얼떨결에 연극에 발을 들이게 된 사연부터 이들의 첫 번째 창작극인 ‘장기자랑’의 준비 과정과 2021년 단원고 공연까지의 여정을 3년에 걸친 촬영을 통해 쫓아간다.

이 감독이 연극하는 엄마들을 이토록 오래 촬영하게 된 건 2019년 일본 NHK가 제작한 세월호 관련 다큐에 스태프로 일했던 경험이 시작이었다. 촬영 중 만난 애진 엄마(김순덕)를 통해 극단 활동을 알게 된 이 감독은 자원봉사로 연극 홍보영상을 찍게 됐는데, 촬영 첫날부터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캐스팅 결과에 뿔이 난 엄마들 사이에 다툼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이 감독은 아무것도 찍지 못한 채 쫓겨난 뒤 엄마들 각자의 집에 방문해 촬영을 이어갔는데, 이게 다큐 제작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NHK 다큐 촬영 땐 유족분들이 저한테 와서 ‘찍기 싫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아이의 마지막 영상을 봐달라고 하는 등, 저 같아도 절대 하기 싫은 일들을 (제작진이)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어머니들을 따로 만나니 질문을 몇 개 하지도 않았는데 2~3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쏟아내시더라고요. 기존 미디어가 담아내는 울거나 분노하는 유족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런 인간적인 이야기들도 전달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었어요.”(이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그렇게 다큐는 그저 연기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밤 늦게까지 홀로 연습을 거듭하고, 배역을 두고 감정이 상해 연습실을 떠나버리기도 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세월호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유쾌함을 선사한다. 무심코 뱉은 ‘연극도 재밌겠네’라는 말 한마디에 연극 선생님이 달려오고, 선생님의 열정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배우 생활을 이어가게 되는 엄마들의 난처한 모습도 미소를 자아낸다.

“18년 열심히 살다간 우리 아이…기억됐으면”

하지만 연극 활동 자체가 떠난 아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만큼, 다큐는 참사의 상흔에 아파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비추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예진이, 모델이 되고 싶었던 순범이 등 아이들을 그대로 닮은 연극 캐릭터를 연기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관객의 눈시울도 뜨겁게 만든다.

엄마들은 다큐에 담긴 연극 ‘장기자랑’에 이어 벌써 극단의 다섯 번째 작품인 ‘연속, 극’ 공연을 앞두고 있다. 남은 가족들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지키며 연극무대까지 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엄마들은 대본 펼 시간이 없어서 팽목항과 안산을 오가는 차 안에서 녹음본을 반복해 들으며 대사를 외우고, 여전히 청심환과 정신과 약에 의존해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연극이 떠난 아이를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연극이 너무 낯설어서 도망갈 구멍만 찾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연극을 계속하는 건, 내 아이를 알리고 싶어서예요. 세월호가 어떻게 침몰했는지, 이런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18년 살다 간 내 아이 이야기를 내가 안 하면 그냥 없었던 아이가 돼버릴 것만 같아서요. 엄마들이 분량에 그토록 욕심을 냈던 이유도 아이들이 녹아있는 배역이 조금이라도 더 불리길 바랐기 때문이에요.”(동수 엄마)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 스틸컷. 사진 영화사 진진

이렇게 아이들을 위해 오르기 시작한 무대지만, 연극은 이들에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수인이 엄마 김명임 씨는 “10년 만에 얻어서 말 그대로 나의 온 우주였던 아이를 잃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며 “그런데 연극을 하면서 다른 이의 삶을 대신 살아보고, 그동안 내 목소리로는 할 수 없었던 말들도 뱉어보면서 몰랐던 세상을 많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순범이 엄마 최지영 씨도 “얼떨결에 시작한 연극이지만,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며 “이번 연극에는 내 얘기만이 아니라 이태원 참사와 같이 비슷한 아픔을 가진 모든 이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더 열심히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장기자랑’은 떠난 이에 대한 추모와 남은 이들의 삶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곱씹으며 양쪽 모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오롯이 전달한다. 이 감독은 “사회적 참사를 다룬 다큐를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피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영화가 2014년 이후 세월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솔하게 보여주고, 안부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새로운 연극 개막 준비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엄마들도 이렇게 살아가는 자신들을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봐 달라고 당부했다.

“참사가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도 참사를 당할지 모른 채 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 다 똑같은 이웃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따뜻한 눈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수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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